[영화속스포츠]'허리케인 카터'

  • 입력 2001년 4월 23일 18시 47분


스포츠를 인생에 비유하는 것은 대단히 감상적이지만 그래도 복싱만큼은 어쩔 수 없다.

사각의 링이 인생의 단면이요 그곳에서는 누구도 경솔해선 안된다는 진리를 이번에는 레녹스 루이스가 비극적으로 증명해주었다.

지난 일요일, 해발 1800m의 남아프리카공화국 카니발시티에서 열린 WBC―IBF 헤비급 통합타이틀전에서 최고의 기량을 자랑하던 루이스는 무명의 하심 라만에게 KO패 당하고 말았다.

그는 링에 오르기 전부터 지쳐있었고 긴 리치를 전혀 살리지 못했다. 운명의 5회전에서 루이스는 장난치듯 비웃으며 뒷걸음 쳤는데 그것은 통합챔피언의 여유가 아니라 전의를 상실한 패배자의 쓰디쓴 자탄이었으며 결국 라만의 오른손 스트레이트가 그 웃음의 비극적 측면을 KO로 마무리해줬다.

체육관보다는 헐리우드를 자주 찾았고 스파링 파트너보다는 금발 미녀를 더 좋아했던 루이스는 출렁거릴 정도로 불어난 뱃살을 가누지 못했다. 사각의 링은 현존하는 최고의 테크니션에게도 비참한 결과를 선사함으로써 다시 한번 링의 냉혹함을 확인시켜줬다.

이제 루이스가 할 일이 있다면 자신에 대한 처절한 반성과 함께 노먼 주이슨 감독의 ‘허리케인 카터’를 보는 것이다. 복싱 선수가 주인공이지만 그 흔한 ‘감동의 권투’ 영화와는 거리가 먼, 오히려 링 밖의 한 인생이 진지하게 전개되는 이 영화에서 레녹스 루이스는 많은 것을 깨달을 것이다.

‘허리케인’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흑인 복싱선수 루빈 카터의 삶. 사각의 링처럼 냉혹한 미국의 현실에서 흑인이라는 이유로 비난과 저주와 폭력 속에서 버텨낸 한 인간의 집념이 영화의 온도를 무겁게 내리누른다.

‘밤의 열기 속으로’와 ‘솔저 스토리’ 등으로 헐리우드 사회파를 대표하는 노먼 주이슨의 역작. 일흔이 넘어 찍은 때문인지 다소 지루하고 작위적인 대목도 없지 않지만 그래도 링 밖의 사회를 따뜻하게 관찰해온 감독의 풍모가 잘 드러나있다.

더욱이 시종을 관철하는 덴젤 워싱턴의 진중한 연기를 진지하게 들여다본다면 아마도 레녹스 루이스는 링을 모독하고 자신을 폄하했던 그 빈정대는 웃음을 두 번 다시 짓지 않을 것이다. <정윤수·스포츠문화칼럼니스트>

pragu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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