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헌재]경기조작 ‘몸통’은 숨고… 선수들만 씁쓸한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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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3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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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척한 얼굴에 흰색 마스크, 푹 눌러쓴 모자. 11일 전북 전주에서 만난 그는 TV의 사건 뉴스에 나오는 ‘범죄자’ 차림새였다. 불과 2주 전까지 일본 오키나와에서 그라운드를 누볐던 에이스 투수의 면모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면서도 불안한 듯 수시로 주위를 살폈다.

검찰에서 프로야구 경기 조작 혐의를 시인한 LG 투수 박현준(26). 그는 이날 기자와 만나 “친한 동생이자 팀 후배인 김성현(23)이 경기 조작 브로커로부터 협박을 받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를 돕기 위해 스스로 경기 조작에 뛰어들었다”고 털어놨다.

박현준이 큰 잘못을 저지른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정정당당해야 할 스포츠에서 그의 행동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 역시 “나 자신을 용납할 수 없다. 팬들에게 용서를 구할 수조차 없는 나쁜 짓을 했다”며 괴로워했다. 지난해 13승을 거두며 한국 프로야구를 이끌 투수로 평가받았던 그는 한순간의 실수로 야구 인생을 그만둬야 할 위기에 놓였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그에게 선수 자격정지 처분을, 구단은 퇴단 조치를 내렸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박현준도 ‘피해자’다. 두 차례 경기 조작에 가담하면서 그가 챙긴 돈은 한 푼도 없다. 첫 번째 사례금 500만 원은 김성현 아버지의 수술비와 약값에 보탰다. 나머지 500만 원도 경기 조작 실패로 협박을 받고 있던 김성현의 빚을 줄이는 데 썼다.

박현준에 앞서 넥센 시절에 경기 조작을 했던 김성현도 마찬가지다. 김성현 측은 “4월 첫 번째 승부 조작으로 500만 원을 챙겼지만 두 번째 경기 조작에 실패하면서 그동안 받았던 돈을 다시 브로커에게 돌려줬다. 여기에 경기 조작 실패로 브로커와 전주(錢主)가 본 손해까지 변상하라며 협박당했다”고 했다. 박현준은 “성현이가 협박에 못 이겨 살고 있던 집의 보증금(3000만 원)까지 줬다고 했다. 갈 곳이 없어 브로커 A의 집에 얹혀사는 신세가 됐다”고 전했다.

마무리로 접어든 프로야구 경기 조작 사건으로 붙잡힌 브로커는 2명이다. 몸통이랄 수 있는 전주는 단서조차 잡지 못했다. 큰 죄를 저지른 ‘범죄자’들은 숨어 있고 꼭두각시 노릇을 했던 두 선수만 죗값을 치르게 됐다.

찬반이 엇갈리는 가운데 경기 조작에 관여한 박현준과 김성현에게 ‘영구 제명’ 조치가 내려질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그게 과연 최선일까. SK 시절 박현준을 지도했던 김성근 고양 감독은 “참 착한 아이였다”고 했다. 넥센 선수들은 “성현이는 여리고 내성적인 동료였다. 경기 조작 같은 걸 할 선수가 아니었다”고 입을 모았다.

한 야구 관계자는 “그들에게 야구장을 떠나라고 하는 건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야구밖에 모르던 이들이 할 수 있는 건 장사 정도다. 이마저 실패하면 조직폭력배가 될 수도 있다. 이들이 진짜 ‘범죄자’가 되도록 방조해선 안 된다는 얘기였다. 한 번 실수를 했다고 그들이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올 기회마저 빼앗는 건 너무 가혹해 보인다. 잘못은 따끔히 혼내되 사회의 일원으로 돌아올 가능성은 남겨둬야 하는 것 아닐까.

이헌재 스포츠레저부 u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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