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으로 호르무즈 해협이 사실상 봉쇄되고 LNG 운반선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치솟는 LNG 가격과 바닥난 재고로 각국이 비상상황인 지금, 조용히 승리를 자축하는 나라들이 있죠. 지난 몇 년 동안 극적인 재생에너지 전환을 이룬 파키스탄과 스페인 이야기입니다.
호르무즈 해협이 막힌다고 해서 햇빛과 바람이 막히는 건 아니잖아요. 기후변화가 아닌 에너지 안보 면에서 재생에너지가 갖는 효용을 새삼 깨닫게 되는데요. 트럼프 대통령의 전쟁으로 태양이 승리하게 된 아이러니를 들여다보겠습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재생에너지가 갖는 ‘에너지 안보’의 가치가 부각되고 있다. 사진은 스페인 세비야에 있는 태양광 발전소의 모습. 게티이미지
호르무즈 해협이 사실상 봉쇄되면서 아시아 국가의 중동산 원유·LNG 수입이 뚝 끊겼죠. LNG 수입 물량을 전부 카타르와 아랍에미리트에서 들여왔던 파키스탄도 마찬가지 상황입니다. 매달 9척씩 들어오던 LNG 운반선이 3월엔 고작 2척만 입항했으니까요.
예전 같으면 아주 난리가 났을 거예요.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때 그랬거든요. 당시 러시아산 천연가스 공급이 끊기면서 LNG 가격이 급등했고요. 파키스탄으로 향하던 LNG 운반선들이 3배 더 높은 가격을 부른 유럽 국가로 유턴해서 가버렸습니다. 이로 인해 파키스탄은 유럽보다 더한 최악의 에너지난에 처하게 됐죠.
무더위 속에서 전국적으로 심각한 정전 사태가 일어났고, 가정 전기요금이 150% 넘게 치솟았고, 급기야 비싼 LNG 물량을 확보하느라 외환보유고가 바닥나 버렸습니다. 결국 국가부도(디폴트) 위기에 몰린 파키스탄은 IMF 구제금융을 받는 신세로 전락했죠. 에너지 대란의 최대 피해자는 구매력에서 밀리는 개발도상국이라는 씁쓸한 현실을 확인시켜주는 사건이었습니다.
파키스탄 펀자브주의 농부들이 태양광 발전을 이용해 사탕수수농장에 물을 대는 현장을 보여주며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이고 있다. 파키스탄은 전체 가구의 4분의 1가량이 태양광 발전으로 전기를 자체 조달한다. 유엔 파키스탄 사무소 그런데 지금 파키스탄은? 물론 파키스탄 정부도 이란전쟁 이후 에너지 절약을 위해 재택근무와 주 4일제를 권장하고 있긴 한데요. 아직 대혼란의 기미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4년 전과 달리, 지금은 LNG 수입이 막힌다고 해서 전기 공급이 당장 끊길 위기에 처하진 않기 때문입니다. 집집마다 건물 위에 펼쳐진 파란색 패널, 즉 옥상 태양광 발전의 힘이죠.
2022년 LNG 위기 이후 파키스탄에선 유례없이 폭발적인 태양광 발전 붐이 일었습니다. 특이한 건 이게 정부가 보조금을 주며 장려해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는 거죠.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친환경적 움직임과도 거리가 멀고요. 이건 어디까지나 시장 논리에 따른 선택이었어요. 비싼 전기요금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개개인이 자기 지갑을 열어 태양광 패널 설치에 나선 겁니다. 초기 투자비를 감당할 수 있는 중산층 가정과 자영업자, 기업들이 앞다퉈 옥상에 태양광 패널을 설치했어요. 때마침 공급 과잉에 시달리던 중국산 태양광 패널이 싼값에 수입되던 시기였고요.
그 결과 지난해 기준 파키스탄에 설치된 태양광 발전 용량은 무려 40GW(추산치). 파키스탄 전체 국가 전력망의 설비용량(46.2GW)에 맞먹는 규모입니다. 태양광 발전이 빠르게 급증하면서 이 나라의 LNG 발전량은 과거의 절반 수준으로 확 줄었고요. 한동안은 남아도는 LNG 수입 물량이 골칫거리가 됐을 정도였어요. 10~15년 장기 계약을 맺은 중동산 LNG 수입 물량을 다른 나라에 전매해야 했죠.
옥상 태양광 발전은 초기 설치비용이 들지만 파키스탄의 비싼 전기요금 때문에 1~2년만 쓰면 투자비를 충분히 회수할 수 있다. 파키스탄 중산층 가정집 옥상마다 패널이 설치된 이유다. IEEFA 제공 그리고 불과 4년 만에 다시 찾아온 에너지 대란. 이번엔 태양광 발전이 파키스탄 에너지 안보의 든든한 방어막이 되고 있습니다. 아와이스 레가리 전력부 장관은 로이터통신 인터뷰에서 “국민 주도의 태양광 혁명이 파키스탄의 에너지 자립도를 높였다”고 강조했죠.
카타르 알자지라, 영국 가디언, 일본 니케이 등, 전 세계 언론이 이런 파키스탄을 주목합니다. “태양광 붐이 파키스탄을 호르무즈 위기에서 보호했다”면서 말이죠. 글로벌 에너지 위기의 최약체로 꼽혔던 파키스탄의 놀라운 반전입니다.
나홀로 여유만만 스페인
파키스탄과 함께 선견지명을 인정받게 된 또 다른 나라가 있죠. 바로 유럽의 재생에너지 강자, 스페인입니다.
스페인은 2018년 사회당 정부 집권 뒤 재생에너지 친화적 정책을 줄곧 펼쳐왔어요. 태양광 발전에 대한 규제를 허물고, 기업이 태양광 발전사와 직접 장기계약을 맺을 수 있게 시장을 열어줬죠. 유럽에서도 유난히 풍부한 햇빛과 강한 바람 덕분에 태양광과 풍력 발전단가는 급격히 낮아졌고요. 지난 5년 사이 스페인의 재생에너지 설비용량은 2배로 급증했습니다. 다른 어느 유럽국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성장세였죠. 이제 스페인 전력의 약 60%는 재생에너지로 생산됩니다. 원자력까지 합친 ‘무탄소’ 발전 비중은 80%에 달하고요.
하지만 급속한 재생에너지 확대에 대한 반대 여론도 적지 않았습니다. 가정용 옥상 태양광 위주인 파키스탄과 달리 스페인은 대규모 풍력·태양광 발전단지가 시골에 들어섰는데요. 태양광 패널의 ‘거울 바다’가 경관을 해치고 풍력 터빈이 소음을 유발한다는 불만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고요. 결정적으로 지난해 4월 이베리아반도 역사상 최대 규모 정전 사태로 전국이 마비됐습니다. 이게 다 과도한 태양광 의존 탓이란 비판이 쏟아졌고요. 스페인의 에너지 정책은 국제적인 조롱거리가 됐죠. 실제론 태양광 자체보다는 이를 받쳐주지 못한 낙후한 전력망이 진짜 원인이긴 했지만요.
스페인은 남서부 지역에 대규모 태양광 발전단지가 들어서 있다. 사진은 유럽 최대 규모로 꼽히는 스페인 누녜스 데 발보아 태양광 발전소. ratedpower.com 하지만 채 1년이 지나지 않은 지난 3월 19일, 브뤼셀 EU 정상회의에 참석한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밝혔습니다. “지난 토요일 스페인의 메가와트시당 전기 가격은 14유로였지만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에서는 100유로를 넘었습니다. 이건 우연이 아닙니다. 스페인 정부가 지난 8년간 재생에너지 보급의 선두에 서기 위해 노력해 온 결과입니다.” 호르무즈 봉쇄로 LNG 값이 급등하면서 온 유럽이 전전긍긍하던 그때, 스페인만은 달랐던 거죠.
이를 두고 폴리티코는 이렇게 전합니다. “유럽의 다른 국가들이 치솟는 에너지 가격에 대한 신속한 해결책을 찾느라 분주한 가운데 , 스페인은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동남아도 LNG 대신 태양광이 대세
심각한 에너지 충격은 에너지 정책의 큰 전환점이 되곤 합니다. 이는 1970년대의 미국을 보면 알 수 있죠. 1973년 1차 오일쇼크로 국제유가는 순식간에 4배로 치솟았고요. 이때부터 미국 운전자들이 더 작고 연비 좋은 차를 사면서 일본차의 전성시대가 열렸어요. 1979년 2차 오일쇼크 땐 지미 카터 당시 대통령이 백악관 지붕에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기도 했죠. 미국 엑손 연구소에서 세계 최초의 리튬이온전지가 발명된 것 역시 1970년대였습니다. 절실함은 변화를 가져오는 법이니까요.
그럼 이번 에너지 위기는 어떨까요. 벌써부터 여러 나라에서 변화의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동안은 ‘LNG=저탄소 화석연료’라는 공식이 통했고요. 많은 나라들이 석탄을 LNG로 대체하는데 열을 올렸는데요. 이번 전쟁으로 깨닫게 된 거죠. 석유든 LNG든 자기 나라에서 생산할 수 없는 연료에 의존하는 건 매우 위험할 수 있단 걸요. 특히 중동산 화석연료 의존도가 유독 높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바빠졌는데요.
2025년 9월 착공식을 열었던 빈그룹의 하이퐁 LNG 발전소 조감도. 베트남 최대 규모의 LNG 발전소를 건설한다는 계획이었지만, 빈그룹은 이 계획을 취소하고 재생에너지 발전단지를 건설하기로 방향을 틀었다. 빈그룹 제공 베트남 최대 민간 기업 빈그룹은 얼마 전 하이퐁에 추진해 온 대규모 LNG 발전 프로젝트의 변경을 정부에 요청했습니다. LNG 발전 대신 태양광·풍력 발전과 배터리 저장장치(ESS)를 결합한 발전 방식으로 전환하게 해달라고요. 빈그룹은 서한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밝혔습니다. “비용 요인 외에도 수입 연료에 대한 의존은 에너지 안보, 공급 자율성, 베트남의 전력 생산비용 통제능력에 상당한 어려움을 초래합니다.” 자기네 땅에서 스스로 생산할 수 있는 건 결국 재생에너지라는 결론인 거죠.
마르코스 대통령이 ‘국가 에너지 비상사태’를 선포한 필리핀은 파키스탄식 분산형 태양광 발전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3월 말 국영 공무원 연금이 가정용 태양광 패널 설치를 위한 대출 신상품을 내놨어요. 200만 전현직 공무원을 대상으로 최대 50만 페소(1246만원)까지 연 5% 금리로 대출해 주는데요. 출시 하루 만에 1200건 넘게 신청이 들어올 정도로 관심이 뜨겁다고 합니다.
중동산 원유 의존도가 90%에 달하는 필리핀은 3월 24일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3월 27일 마닐라의 말라카낭 대통령 관저 인근에서 운송 노동자들이 유류 가격 인상에 항의하는 집회를 벌이고 있다. AP 뉴시스 인도네시아 프라보워 대통령도 3월 말 야심 찬 태양광 확보 계획을 발표했어요. 무려 100GW에 달하는 태양광 발전 설비용량을 3년 안에 달성하겠다는 계획이죠. 현재 누적 용량은 고작 1GW에 불과한데 말이죠. 전문가들은 인도네시아의 전력망 인프라나 인허가 기간을 고려했을 때 아무리 빨라도 5년 안엔 불가능하다며 다소 회의적인 반응인데요. 추진력 강하기로 유명한 인도네시아 정부가 밀어붙이고 있으니 두고 볼 일입니다.
결국 이란전쟁으로 재생에너지 전환이 기후변화 문제만이 아닌 에너지 안보 문제라는 교훈을 모두가 얻기 시작했습니다. 왜 4년 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겪고도 그걸 모른 채 지나쳤을까라는 한탄이 뒤늦게 나오는데요. 동시에 이 상황이 에너지저장장치(ESS) 호황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국내 배터리 업계에도 봄이 찾아오기를 기대해봅니다. By.딥다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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