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보란 듯 뭉친 시진핑과 푸틴

  • 주간동아
  • 입력 2025년 5월 18일 09시 08분


코멘트

중·러, 에너지·군사 협력 강화… 트럼프 친러 행보 성과 못 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왼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이 5월 9일(현지 시간) 러시아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열린 80주년 전승절 기념 열병식을 지켜보며 이야기하고 있다. 뉴시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왼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이 5월 9일(현지 시간) 러시아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열린 80주년 전승절 기념 열병식을 지켜보며 이야기하고 있다. 뉴시스
“국제 정세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형세는 동풍이 서풍을 제압하고 있다.”

중국을 건국한 마오쩌둥은 1957년 11월 18일(이하 현지 시간) 스탈린 소련공산당 서기장 초청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해 이렇게 말했다. 동풍(東風)은 소련·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들이고, 서풍(西風)은 미국 등 자본주의 국가들을 가리킨다. 당시 마오는 소련이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발사에 성공한 것을 축하하며 이런 연설을 했다. 이후 중국은 자체 개발한 탄도미사일에 ‘동풍’이라는 명칭을 붙이기 시작했다. 중국말로 ‘둥펑’(영어 약자 DF)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2월 17일 빅테크 대표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마오의 발언을 인용하며 “장기적으로 동풍이 우세할 것”이라면서 미국 등 서방 과학기술에 대한 중국의 자신감을 강조하기도 했다. 당시 발언은 중국 인공지능(AI) 스타트업 딥시크가 저비용-고효율 AI 모델을 개발해 국제사회를 깜짝 놀라게 만든 것에 고무돼 나온 것이었다.

트럼프 ‘역키신저 전략’ 패착
시 주석은 5월 7일부터 10일까지 모스크바를 국빈 방문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밀월 관계를 대내외에 과시했다. 5월 8일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고, 9일에는 옛 소련의 제2차 세계대전 승전 80주년 기념 열병식에 참석했다. 5월 9일은 옛 소련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을 항복시켰던 날이다. 러시아는 이날을 전승절이라고 부르며 매년 기념행사를 벌여왔다. 시 주석은 2013년 3월 중국 국가주석으로서 첫 해외 일정으로 모스크바를 국빈 방문한 이후 지난해 10월 카잔에서 열린 브릭스(BRICS) 정상회의까지 모두 10차례 러시아를 방문한 바 있다.

시 주석의 국빈 방문은 2023년 3월 이후 2년 만이고, 러시아의 전승절 기념 행사에 참석한 것은 승전 70주년이던 2015년 이후 10년 만이다.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제사회의 강력한 제재를 받고 있는 러시아 전승절 기념 열병식에 중국 인민해방군 의장대까지 참여했다. 시 주석은 푸틴 대통령과 함께 연단에서 러시아군과 중국군의 행진 모습을 지켜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시 주석은 이번 방문의 목적이 ‘반미 동맹 강화’에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다. 5월 7일 러시아 관영 일간지 ‘로시스카야 가제타’에 기고한 ‘역사를 거울로 삼아 함께 미래를 열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중국과 러시아는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에서 함께 싸우고 피로 우정을 맺었다”며 “전쟁 80년이 지난 오늘날 일방주의와 패권, 횡포, 괴롭힘 행위는 심각한 해악을 끼치고 있다”고 밝혀 미국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시 주석과 푸틴 대통령은 크렘린궁에서 3시간 30분에 걸쳐 정상회담을 가진 후 발표한 ‘새 시대 포괄적 파트너십과 전략적 상호작용 강화’라는 제목의 공동성명에서도 미국에 강력하게 맞서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두 정상은 “양국은 불법적인 일방적 괴롭힘, 관세와 수출 통제 남용, 국제 무역과 경제 질서를 파괴하고 글로벌 생산·공급망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일방적 보호주의 조치에 단호히 반대한다”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정책을 비난했다. 두 정상은 또한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미국의 ‘이중 억제(Dual Deterrence)’ 정책에 단호히 대응하고자 양국이 협력을 강화하고 군사협력도 지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공동성명 통해 미국 정면 비판
시 주석은 우크라이나 문제에서도 푸틴 대통령 손을 들었다. 공동성명에서 “양국은 우크라이나 평화를 위한 모든 노력을 지지하지만 분쟁을 장기적으로 해결하려면 근본 원인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을 반대하면서 이같은 근본 원인을 해결해야 종전에 동의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심지어 두 정상은 북한 편까지 들었다. 공동성명에서 “북한에 대한 일방적인 강압 조치와 무력 압박, 동북아 지역 군사화 정책은 물론 대결을 유발하는 정책을 포기하고, 한반도 긴장을 줄이면서 무력·군사 충돌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실질적 조처를 취할 것을 관련국들에 강력히 촉구한다”고 밝혔다. 이는 북한·중국·러시아의 ‘전략적 삼각 연대’가 앞으로 더욱 공고해질 것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중·러 동부 노선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은 ‘시베리아의 힘’으로 불린다. 뉴시스
중·러 동부 노선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은 ‘시베리아의 힘’으로 불린다. 뉴시스
중국을 견제하려고 친러시아 행보를 보여온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중국과 러시아의 밀착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동안 서방 국가들의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러시아가 무력으로 점령한 영토를 포기하라고 우크라이나를 압박하는 등 러시아의 주장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종전을 위한 중재 외교를 추진했지만 지금까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중국산 제품에 고율 관세를 매기는 등 압박한 반면, 러시아는 에너지 분야에서 중국과의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미국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지난해 러시아와 중국의 교역 규모는 2450억 달러(약 347조2000억 원)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으며 2030년까지 3000억 달러(약 425조 원)로 늘릴 방침이다. 양국은 또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중국으로 수송하는 ‘시베리아의 힘 2’ 가스관 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교역 대부분을 자국 통화로 결제하는 방안도 적극 추진하기로 했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시 주석, 푸틴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과 각각 관세전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놓고 협상을 하고 있다”며 “트럼프 대통령은 아직까지 이 두 협상 모두에서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이후 중국을 고립시키려고 러시아와의 관계를 개선하는 이른바 ‘역키신저(reverse Kissinger) 전략’을 추진해왔다. ‘키신저 전략’은 ‘중국과 연대해 소련(현 러시아)을 견제한다’는 ‘연화제아(聯華制俄)’를 뜻한다.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은 재임 시절 헨리 키신저 백악관 국가안보담당 보좌관(이후 국무장관 역임)의 조언에 따라 소련을 견제하고자 중국과의 수교를 추진했다.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왼쪽)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7년 10월 백악관에서 만났다. 뉴시스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왼쪽)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7년 10월 백악관에서 만났다. 뉴시스
실패한 ‘연아제화’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역으로 응용해 러시아를 통해 중국을 견제하는 전략을 구사해왔다. 한마디로 말해 ‘연아제화(聯俄制華)’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시 주석과 푸틴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 보란 듯이 반미 연대를 과시하고 있다. 이는 ‘역키신저 전략’의 실패라고 볼 수밖에 없다.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는 “푸틴과 시진핑은 전승절을 통해 자신들의 질서가 유효하다는 ‘정치적 쇼케이스’(전시 행사)를 국제사회에 보여줬다”고 지적했다.

특히 중·러의 밀월 관계에서 주목할 점은 군사 분야 협력이다. 양국은 갈수록 합동군사훈련 범위와 강도를 높이고 있다. 아르티움 루킨 블라디보스토크 극동대 국제관계학 교수는 “중국과 러시아가 미·일 및 나토처럼 상호방위조약을 맺지는 않았지만 함께 군사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협력체계를 갖췄다”면서 “앞으로 동맹 수준의 군사협력이 이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러시아 언론 매체들은 “푸틴과 시진핑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세계정치의 새로운 리더십이 명확히 형성됐음을 보여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시 주석과 푸틴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이 퇴임한 후에도 미국의 패권 견제를 위해 서로 대립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이 기사는 주간동아 1489호에 실렸습니다〉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