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고립 막고, 대학 살며 청년과 교류… 초고령 사회 주거 대안 ‘UBRC’가 뜬다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4월 16일 03시 00분


[실버 시프트, 영올드가 온다]
뉴욕주립대 ‘브로드뷰’ 가보니
220채 ‘영올드’ 단지 2년전 개관
“학생들과 강의듣고 세대간 소통”

미국 뉴욕 퍼처스 칼리지 내 은퇴자 거주 단지인 브로드뷰에서 입주민들이 TV를 시청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퍼처스=임우선 특파원 imsun@donga.com
미국 뉴욕 퍼처스 칼리지 내 은퇴자 거주 단지인 브로드뷰에서 입주민들이 TV를 시청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퍼처스=임우선 특파원 imsun@donga.com
“우리 부부는 평생 배움에 관심이 많았어요. 대학 졸업 후 석박사를 했고 새로운 걸 배우고 싶은 마음은 80대인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이곳엔 같은 마음을 가진 친구들이 가득해요. 그게 우리가 ‘대학 기반 은퇴자 공동체(UBRC)’를 선택한 이유입니다.”(‘브로드뷰’ 거주자 주디 즈바이그 씨)

지난달 25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북동쪽으로 차로 1시간 거리인 뉴욕주립대(SUNY) ‘퍼처스 칼리지’를 찾았다. 인문예술 분야가 유명한 이 대학은 뉴욕주 웨스트체스터카운티의 아름다운 나무들 사이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대학의 특별한 점은 캠퍼스 안에 4층짜리 아파트와 싱글 하우스 50여 채가 있다는 점이다. 바로 2023년 개관한 은퇴자 거주 단지 ‘브로드뷰 시니어 리빙’이다.

브로드뷰 안에서 펼쳐지는 장면은 이색적이었다. 운동장에는 풋볼 게임을 하는 대학생이 많았지만 헤드폰을 낀 채 캠퍼스 도로를 따라 조깅을 하는 노인들 또한 많았다. 즈바이그 씨는 “지난 학기에는 학생들과 같이 아프리카 역사 수업을 들었다. 생애 처음으로 아프리카 역사를 배웠는데 정말 즐거운 경험이었다”고 했다. 그는 “세대 간 학습, 은퇴자들의 학생 멘토링, 공동체 교류가 끊임없이 펼쳐진다는 것이 이곳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12월 65세 고령인구가 20%를 넘어서며 우리 사회도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하지만 UBRC 등 다양한 주거 선택지가 제공되는 선진국과 달리 우리 영올드(Young Old·젊은 노인)들의 선택 폭은 너무나 좁다. 초고급 시니어 타운이 아니면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한 노인복지주택 등으로 양분돼 눈높이에 맞는 주거시설이 부족한 것이다. 삼성증권 이경자 팀장은 “초고령화 속도는 전 세계 최고인 반면 시니어하우징을 비롯한 실버 인프라가 현저히 부족하다”며 “시니어들이 양질의 시설과 서비스를 요구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부촌 떠나 캠퍼스 안 주택단지로” 청강-동아리 즐기는 영올드


2부 〈1〉 美서 뜨는 대학내 은퇴자 단지
2023년 문 연 퍼처스 칼리지내 단지
계약 쇄도… 1채 빼고 219채 ‘완판’
“커뮤니티 즐기느라 매일 어메이징… 젊은 세대와 함께 호흡, 큰 장점”

2023년 12월 문을 연 브로드뷰는 500에이커(약 61만 평) 규모의 퍼처스 칼리지에서 40에이커 부지를 기반으로 마련된 대학 내 은퇴자 거주 단지다. 174채가 ‘ㄷ’자 모양의 4층 아파트에 마련됐고 46채는 싱글하우스 형태로 지어졌다. 입주 시작 수년 전부터 사전 계약 등 인기를 누려 입주 1주년이 지난 현재 싱글하우스 1채를 제외하고는 219채가 모두 ‘완판’됐다.

브로드뷰 운영을 이끄는 애슐리 웨이드 총괄이사는 “대학 캠퍼스와 도서관을 안방처럼 누리면서 젊은이들과 함께 대학 강의를 듣는 등 ‘세대 간 학습’을 할 수 있고 자신들의 인생 경험과 전문 지식을 젊은이들을 돕는 데 쓸 수 있다는 점이 대학 기반 은퇴자 공동체(UBRC)의 큰 장점”이라며 “무엇보다 비슷한 지적 욕구와 사회적 활동성을 가진 또래 은퇴자들이 ‘공동체’를 이뤄 살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 포인트”라고 말했다.


● 은퇴자 통한 대학의 ‘재정 윈윈’ 모델

브로드뷰는 2003년 퍼처스 칼리지를 이끌던 토머스 슈워츠 총장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됐다. 실현까지는 난관이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UBRC 건립을 위한 부지 이용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사립대와 달리 퍼처스 칼리지는 뉴욕주립대 소속이라 주(州)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게 큰 숙제였다. 마침내 2011년 앤드루 쿠오모 뉴욕 주지사가 UBRC 건립을 위한 토지 임대를 허용하면서 2023년 결실을 볼 수 있었다.

브로드뷰는 퍼처스 칼리지와 별개인 비영리 재단으로 운영되는데, 입주를 위해서는 62세 이상이어야 하고 간단한 인지 평가를 통해 안전한 독립 생활이 가능한지 확인돼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재정 상태다. 입주 시 납부했다 퇴거 시 90%를 돌려받는 일회성 등록 비용(최소 27만∼최대 241만 달러 선)이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매달 내는 생활비(최소 3810∼최고 1만4380달러 선)를 남은 기대수명까지 안정적으로 낼 수 있을지를 입증해야 한다.

일단 입주하고 나면 매끼 식사와 매주 집 청소, 대형 온수 수영장과 헬스장 등 클럽하우스 시설 이용까지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다. 물리치료나 인지 강화를 위한 전문 의료진이 상주하는 한편 영화관, 미용실, 네일아트숍 등까지도 내부에 마련돼 있다.

입주민들은 요가 수업(왼쪽)을 들을 수도 있고, 함께 어울려 카드 게임을 즐기기도 한다. 매달 일정 생활비(최소 3810달러∼최고 1만4380달러)를 내면 식사와 청소 등의 서비스가 제공되며, 도서관 등 대학 시설도 이용할 수 있다. 퍼처스=임우선 특파원 imsun@donga.com
입주민들은 요가 수업(왼쪽)을 들을 수도 있고, 함께 어울려 카드 게임을 즐기기도 한다. 매달 일정 생활비(최소 3810달러∼최고 1만4380달러)를 내면 식사와 청소 등의 서비스가 제공되며, 도서관 등 대학 시설도 이용할 수 있다. 퍼처스=임우선 특파원 imsun@donga.com
이날 둘러본 브로드뷰에서는 삼삼오오 함께 둘러 앉아 카드 게임을 하는 은퇴자들부터 요가룸에서 전문강사의 수업을 듣는 이들의 모습까지 다채로운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 브로드뷰 관계자는 “모든 수업과 교류 프로그램은 은퇴자들의 니즈와 취향을 알고 존중하는 전문 담당자에 의해 설계된다”며 “전체적인 운영 역시 미국의 가장 큰 은퇴자 주거 전문 기업 중 하나인 라이프 케어 서비스(LCS)가 맡는다”고 전했다.

● 영올드 은퇴자가 대학생 멘토링도

브로드뷰를 찾은 은퇴자들은 UBRC에서 여생을 보내려 온 이유를 ‘공동체’에서 찾았다. 브로드뷰 입주자 대표를 맡고 있는 하워드 즈바이그 씨는 “우린 평생 좋은 부촌의 싱글하우스에 살았지만 해가 가고 나이가 들수록 외로워지고 고립되는 느낌을 받았다”며 “이곳에 온 뒤 가장 좋은 점은 새로운 친구를 만나고 커뮤니티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부인 주디 씨는 “평생 살던 집을 정리하고 이동한다는 게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다”라면서도 “하지만 자녀나 다른 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정리할 수 있는 힘과 판단력이 있을 때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이들은 “우리 나이에 새로운 친구를 만드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곳에서는 가능하다”며 “다양한 분야의 경력을 가진 65세부터 95세 이상의 이웃과 만나고 교류하는 건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쁜 일”이라며 웃었다. 거주민들이 매주 일요일 운영하는 대표 프로그램인 ‘선데이 살롱’에서는 한 사람씩 돌아가며 자신이 살아 온 배경과 전문 분야에 대해 발표를 하고 정보를 나눈다.

브로드뷰의 은퇴자들이 자신들의 경험과 역량을 대학 내 젊은 학생들을 위해 쓰는 점도 눈에 띄었다. 이날 브로드뷰에서 만난 입주민 스티븐 셰로브 박사 역시 그랬다.

은퇴 전 뉴욕대(NYU) 그로스먼 롱아일랜드 의과대 창립 학장이었던 80세의 셰로브 박사는 최근 의대 진학을 희망하는 캠퍼스 내 학생 20여 명을 인근 종합병원과 연결해 이들이 ‘섀도잉’(의료진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진료를 관찰하는 것)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주선했다.

브로드뷰 관계자는 “퍼처스 칼리지는 (학비가 싼 주립대 특성상) 집안에서 처음으로 대학에 진학한 학생이나 한부모 가정 학생 등이 적지 않다”며 “브로드뷰의 은퇴자들은 이런 학생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멘토가 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들은 면접 보는 법과 같은 기본적인 멘토링부터 특정 분야의 강사로 나서거나 사회적 인맥을 연결해 주는 등 다방면으로 활약 중이다. 브로드뷰는 “재정적으로도 지난해 273개의 장학금을 지원하고 200만 달러 이상을 기부했다”고 밝혔다.

#영올드#UBRC#퍼처스 칼리지#브로드뷰#은퇴자 거주 단지#초고령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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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많은 댓글

  • 2025-04-16 11:26:04

    미국에선 가능한데 우리나라에선 글쎄...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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