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2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2명의 여성에 대해 ‘유죄의 증거가 충분하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사건이 발생한 말레이시아 현지 법원이 이 여성들의 행위를 ‘계획적인 공모’라고 표현하며 사실상 검찰 측 손을 들어준 것이다.
AP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말레이시아 샤알람 고등법원은 16일 재판에서 인도네시아 출신 시티 아이샤(26)와 베트남 출신 도안티흐엉(30)이 북한인들과 ‘계획적으로 잘 짜여진 공모’를 꾸며 김정남을 살해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아즈미 아리핀 판사는 이날 “검찰 측이 ‘반증이 없을 경우 유죄가 확정될 수 있는(prima facie)’ 주장을 펼쳤다”며 “피고인들이 (김정남의) 죽음을 초래한 범법자라는 분명한 입장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피고인 측이 반론에 나서라고 요청했다.
아직 유죄 판결이 내려진 것은 아니지만 피고인 측에서 적절한 반박이 없을 경우 재판부의 판단을 뒤엎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살인죄의 경우 예외 없이 사형이 선고된다. 아이샤와 흐엉은 구금된 상태에서 11월과 내년 2월 반론에 나서게 된다.
○ 재판부 “범행 후 손 씻은 행위, 매우 이상해”
두 여성은 지난해 2월 13일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김정남의 얼굴에 추후 VX로 확인된 맹독성 신경물질을 바르고 달아났다. 재판부는 이들이 △VX가 신체에 흡수되기 쉬운 눈 부위를 집중적으로 공략한 정황과 △범행 직후 화장실에서 손을 씻은 행위를 김정남 살해 의사의 핵심 근거로 꼽았다. 아리핀 판사는 “(범행 후) 화장실로 달려간 이들의 절박한 행위가 손에 묻은 독성 물질을 씻어내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할 근거가 충분하다”고 말했다.
두 여성이 단순히 몰래카메라를 촬영한다고 생각하고 범행에 의도치 않게 가담했다는 변호인 측의 주장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리핀 판사는 몰래카메라 영상에 흔히 등장하는 진행자 소개나 나중에 몰래카메라임을 알리는 순서 등이 없었던 점을 볼 때 ‘몰카’로 보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다만 재판부는 검찰 측이 폐쇄회로(CC)TV 영상만을 근거로 주장을 펼친 것은 검찰 측 주장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 北의 ‘정치 살인’ 주장엔 “구체적 증거 부족”
재판부가 “(피고인들이 범행 직후 화장실로 가는 등의) 행위를 한 이유에 대해 설명할 의무는 피고인 측에 있다”고 밝히자 변호인단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이들은 CCTV 영상만으로는 범행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우며, 피고인들이 범행 후 옷을 갈아입지 않은 점 등을 살해 의도가 없었다는 증거로 제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말레이시아 당국이 재판이 정치화되는 것을 꺼려하는 가운데 진짜 범인은 도주한 4명의 북한 용의자임을 강조한 변호인 측 주장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날 “정치적 살인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으나, 구체적 증거는 없다”고 밝혔다. 범행 현장에 있었던 북한인 용의자 4명은 모두 그날 도주해 현재 북한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두 피고인은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비교적 차분함을 유지했으나 재판 말미에 아이샤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해 변호인단이 그를 위로해주는 장면이 포착됐다고 AP통신은 전했다. 흐엉의 변호인단은 재판이 끝난 뒤 취재진에 “결과는 실망스럽지만 향후 증인들을 불러 반론을 펼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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