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기류는 북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날 오후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숙소인 샹그릴라 호텔. 김일성 김정일 부자 배지를 단 40대 북한 남성이 긴박한 발걸음으로 호텔을 나섰다. 경호원의 안내를 받아 고위급 인사로 보인 이 남성은 마주친 동아일보 기자가 ‘정상회담을 어떻게 전망하느냐’고 묻자 “트럼프가 성의 있게 나와야 잘될 것이다. 저쪽(미국)에서 주는 걸 봐야 한다”며 날카롭게 반응했다.
그런데 이런 기류는 이날 저녁부터 급격하게 낙관적으로 바뀌었다. 특히 이날 오후 늦게 백악관이 다음 날 오전·오후 회담은 물론 오찬 계획까지 통보하자 북-미가 의제와 관련해서도 큰 틀에서 합의한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이와 관련해 북-미 비핵화 협상 주역 중 한 명인 앤드루 김 미 중앙정보국(CIA) 코리아임무센터장은 이날 동아일보 기자와 두 차례 만나 “(협상이) 잘될 거라 본다”고 자신했다. 김 센터장은 “협상이 난항 중 아니냐”는 질문엔 “아니다. 나름대로 충분한 준비를 하고 있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회담 전날 밤 퍼진 이 같은 기대감은 이날 오후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싱가포르 JW매리엇 호텔에서 예정에 없던 기자회견을 자청하면서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었다. 당초 매슈 포틴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담당 선임보좌관이 익명을 전제로 브리핑할 예정이었으나 미국 측 ‘실무 총책’인 폼페이오 장관이 전면에 나선 것. 정상회담을 하루 앞두고 폼페이오 장관이 직접 마이크를 잡은 것을 두고 싱가포르 현지에선 북-미 양측이 신경전을 벌이면서도 협상 돌파구를 찾은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기 시작했다. 폼페이오 장관은 회담 의제와 관련해 “북-미 정상회담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뀌지 않았다. 한반도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가 미국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의미 있는 유일한 결과”라고 잘라 말했다. 이어 “외교적 노력이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지 못한다면 대북 제재는 더욱 강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핵 폐기 검증에도 무게를 실었다. 폼페이오 장관은 “CVID의 ‘V(검증 가능한)’가 중요하다”며 “북한의 비핵화 조치에 대한 검증이 이뤄져야만 북한에 대한 보상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물론 폼페이오가 CVID 중 검증과 사찰을 특히 강조한 것을 두고 비핵화 시간표의 최종 합의를 위해 마지막 대북 압박에 나섰다는 해석도 있다.
이에 앞서 성 김 주필리핀 미국대사와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은 이날 오전부터 비핵화 합의를 위한 막판 합의를 시도했다. 지난달 27일부터 판문점에서 비핵화 의제 협상을 벌였던 두 사람은 이날 오전과 오후 잇따라 접촉했다. 외교 소식통은 “언제까지 비핵화를 실현하느냐가 최대 쟁점”이라며 “미국이 북한 측에 비핵화 완료시기를 명시하도록 요구하고 있지만 북한은 난색을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 北 “비핵화 명분 위해 종전선언 필요”
북한은 11일에도 완전한 비핵화 대가로 종전선언은 물론이고 북-미 관계 정상화에 대한 미국의 확실한 약속을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핵 폐기에 따른 보상 차원에서 미국의 확실한 보증이 필요하다는 것.
하지만 미국은 12일 회담에서 북한이 종전선언에 서명할 가능성은 높게 보고 있지 않다. 다만 폼페이오 장관은 이날 회견에서 북한의 핵 폐기 대신 ‘한반도의 CVID’를 언급하며 추후 미국 전략자산의 철수 가능성을 내비치기는 했다. 폼페이오 장관은 “북한이 비핵화를 하면 이전 미 행정부와는 다른 방식으로 체제 보장을 해줄 준비가 돼 있다”고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다.
싱가포르=신진우 niceshin@donga.com·한기재 기자·윤완준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