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없이는 평화도 없다”… 美 들끓는 흑인들의 분노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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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경관 등 뒤 총격’에 항의 확산… ‘흑인의 생명 소중’ 구호 다시 등장
보디캠 도입 재발방지 약속에도 “시장부터 물러나라” 항의시위
“모른척하려다 진실 밝히려 용기 내”… 동영상 제보 20대 영웅으로 떠올라

백인 경관이 등 뒤에서 쏜 8발의 총탄에 맞아 숨진 흑인 월터 스콧 씨(50) 사건이 미국 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총을 쏜 마이클 슬레이저 경관(33)은 즉각 면직 처분을 당해 민간인 신분으로 재판을 받게 됐지만 국민적 분노가 온·오프라인에서 확산되고 있다. 페이스북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선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는 시위 문구가 다시 등장했고 사건이 발생한 사우스캐롤라이나 노스찰스턴 시에서는 시장 사퇴 등을 요구하는 시위가 확산되고 있다.

키스 서미 노스찰스턴 시장은 8일 기자회견을 열고 “이런 불행한 사건이 재발되지 않도록 노스찰스턴 시 경찰 전원이 보디캠(몸에 부착하는 카메라)을 장착하도록 조치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서미 시장의 기자회견은 “정의 없이, 평화도 없다” “시장부터 물러나라”는 시위대 수백 명의 함성 때문에 여러 차례 중단됐다고 CNN방송은 전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상원은 다음 주 전체회의를 열고 주 경찰관의 보디캠 장착 의무화 법안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예정이다.

슬레이저 경관은 스콧 씨가 자신의 전기충격기를 가져가려고 해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는 내용의 사건보고서를 작성했지만 동영상 제보로 거짓임이 드러났다. CNN은 8일 “슬레이저 경관은 스콧 씨가 총탄을 맞고 쓰러지자 손을 등 뒤로 돌려 수갑을 채운 뒤 총을 발사했던 지점으로 돌아가 검은색 물체를 집어서 스콧 씨 옆에 떨어뜨렸다. 그것이 문제의 전기충격기였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보도했다. 슬레이저 경관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상황을 조작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사건에 대해 경찰들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에디 드리거스 노스찰스턴 경찰서장은 “사건 동영상을 보면서 역겨웠다”고 말했다. 한 경찰 관계자는 “NYPD의 총기 사용 지침에도 ‘심지어 중범죄자라도 단지 그의 도주를 막기 위해 경관이 총을 쏘는 것은 안 된다’고 명시돼 있다”고 말했다.

비무장 흑인에게 권총을 난사한 슬레이저 경관의 과거 공권력 남용 정황도 추가로 포착됐다. 노스찰스턴에 거주하는 흑인 마리오 기븐스 씨는 9일 슬레이저 경관으로부터 아무런 이유도 없이 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2013년 9월 슬레이저 경관이 갑자기 집으로 찾아와 자신에게 전기충격기를 쏘고 수갑을 채워 경찰차 뒤에 태웠다고 말했다. 곤욕을 치른 뒤 풀려난 기븐스 씨는 슬레이저 경관의 공권력 남용을 조사해 달라고 노스찰스턴 경찰서에 탄원서를 제출했으나 감찰 결과 공권력 남용 혐의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 사실을 알게 됐다.

제보자 산타나 씨
제보자 산타나 씨
동영상을 제보해 사건의 실체를 밝힌 23세 청년 페이딘 산타나 씨는 미국 사회의 영웅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는 8일 미국 N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출근길에 사건을 목격하곤 바로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며 “경관과 스콧 씨가 바닥에 엉켜 몸싸움을 하던 중 스콧 씨가 일어나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경관은 아무런 경고 없이 그냥 총을 쐈다”고 증언했다.

산타나 씨는 신변의 위협 등이 걱정돼 처음엔 이 사실을 알리지 않고 마을을 떠날까 고민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그는 스콧 씨가 전기충격기를 빼앗으려다 피격됐다는 뉴스를 보고 마음을 바꿨다. 그는 “경찰이 잘못된 행동을 한 것이 분명해서 용기를 내 스콧 씨의 변호사에게 동영상을 전달했다”고 말했다.

희생자 스콧 씨 가족 등은 “그 동영상이 없었다면 이번 사건도 ‘퍼거슨 시의 마이클 브라운 사건’처럼 진실 규명에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라며 “산타나 씨야말로 영웅”이라고 말했다. 누리꾼들은 “동영상 제보자가 용기 있는 행동을 했다” “모른 척할 수도 있었을 텐데 시민의식이 돋보인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편 스콧 씨 유가족의 의연한 모습은 많은 화제를 낳고 있다. 특히 스콧 씨 어머니가 “그 무엇도 내 아들의 빈자리를 대신할 순 없다. 하지만 사랑스러운 아들을 총 쏴서 죽인 그 사람에 대해서도 용서의 마음을 가질 것”이라고 말했다고 CNN은 전했다.

뉴욕=부형권 특파원 bookum90@donga.com / 이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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