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정치족벌, 총선서 줄줄이 ‘묻지마 당선’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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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세 이멜다 하원선거서 압승… 부패혐의 아로요도 재선 성공
서방언론 “정책 아닌 인물 보고 투표”

필리핀 정치족벌 부활
13일 실시된 필리핀 총선에서 마르코스 가문이 약진했다. 이번 총선에서는 상원 24석 중 12석과 하원 236석 전체가 바뀌었다. 동시에 실시된 지방선거에서는 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 의원 약 1만7500명이 선출됐다.

이번 총선에서 가장 관심을 모은 건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 부인인 이멜다 마르코스 씨다. 그는 83세의 고령에도 고향 일리코스 노르테 주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하원의원에 재선됐다. 딸 마리아 이멜다 마르코스 씨와 친척인 안젤로 바르바 씨도 각각 주지사와 부주지사를 연임하게 됐다. 아들 페르디난드 봉봉 마르코스 2세는 2010년 상원의원 배지를 달았다. AP통신은 “이번 총선에서 부패 혐의 등으로 축출됐던 마르코스 가문이 화려하게 부활하면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이 유력한 대권후보로 떠오르고 있다”고 15일 보도했다.

이멜다 씨는 유세 기간 아들에 대한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대선 출마 가능성에 대해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면 자랑스러울 것이다”라며 속내를 드러냈다. 일부 현지 언론은 그를 유력 후보로 거론하면서 성급하게 부자(父子) 대통령 탄생까지 점치고 있다. 막강한 권한을 가진 상원의원은 필리핀에서 대권으로 향하는 관문으로 통한다.

베니그노 노이노이 아키노 현 대통령은 마르코스 가문의 부활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다고 외신은 전했다. 아키노 대통령의 부친은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독재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벌이다 1983년 암살당한 베니그노 아키노 전 상원의원. 모친은 남편의 뒤를 이어 혁명을 이끈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이다. 모자(母子) 대통령 가문이다.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독재를 각인시키기 위해 현대사 교육을 강화해 왔던 아키노 정부는 마르코스 가문의 재집권을 마냥 지켜볼 수만은 없는 처지다.

이번 총선에서는 부패 혐의로 입지가 흔들렸던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 전 대통령도 기반 지역인 팜팡가 주에서 하원의원에 재선됐다. 아키노 대통령은 개혁을 추진하면서 부패척결 1호로 아로요 전 대통령을 꼽은 바 있다. 마카파갈 가문은 부녀(父女) 대통령을 배출했다.

필리핀 정치판은 이번 선거에서도 소수 정치족벌이 주무르는 모습을 답습했다. 일종의 지방 귀족인 이들은 관리구역의 경제권은 물론이고 주요 공직도 독차지한다. 대대손손 세습된 권력 덕분에 부패나 비리를 저질러도 정계에 복귀하는 일이 다반사다.

선거 때마다 되풀이되는 이 같은 정치족벌의 ‘묻지마 식’ 출마에 대해 조금씩 자성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고 알자지라 방송이 전했다. 뇌물수수 혐의로 임기 중 퇴진한 조지프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은 이번 선거에서 마닐라 시장에 선출됐다. 마르코스 가문의 이멜다 씨는 구두 3000켤레를 수집한 것이 드러나 국민적 비난을 받았고, 딸 마리아 이멜다 씨는 버진아일랜드에 거액의 재산을 은닉한 의혹을 받고 있다. 대부분 낙마하긴 했지만 남부 삼보앙가 지역에서는 성폭행 전과가 있는 로메오 잘로스요스 가문에서 부적절한 후보들이 출마해 구설에 올랐다.

서방 언론은 “필리핀의 선거는 정당이나 정책이 아닌 인물과 인기 위주로 판가름 난다”며 “‘정치 마피아’와 다름없는 정치족벌 때문에 필리핀의 정치 수준이 뒷걸음질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필리핀#마르코스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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