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재판소, 전쟁범죄 前 국가원수에 첫 유죄판결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4월 27일 03시 00분


코멘트
찰스 테일러 전 라이베리아 대통령(64)이 26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형사재판소(ICC) 산하 시에라리온특별법정(SCSL)에서 시에라리온 내전에 개입해 민간인 학살을 교사하고 방조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나치 독일의 주요 관계자들이 전범 혐의로 처벌된 적은 있지만 전직 국가 정상이 국제재판소에서 형사 재판을 받고 유죄판결을 받은 것은 처음이다. 2007년 6월 첫 재판이 시작된 지 5년 만이다. ‘발칸의 도살자’로 악명을 떨쳤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유고연방 대통령이 1999년 유고특별법정(ICTY)에서 재판을 받았지만 2006년 감옥에서 사망해 판결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리처드 루식 재판장은 판결문에서 “테일러 전 대통령은 다이아몬드를 받고 시에라리온 반군에게 무기를 제공했으며 반군이 저지른 모든 반인륜적 범죄와 전쟁 범죄를 교사, 선동한 혐의에 대해 유죄가 인정된다”고 했다. 테일러는 테러행위, 살인, 강간, 여성 성노예화, 아동 강제 징집 등 총 11가지 혐의로 기소됐다. 재판부는 이어 “테일러가 시에라리온 반군에게 학살과 강간 등을 직접 명령했다는 일부 혐의는 입증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5월 16일 형 선고와 관련된 청문회를 열고 5월 30일 형량을 선고하겠다고 밝혔다. 짙은 감색 양복을 입은 테일러는 2시간 넘게 진행된 판결문 낭독을 무표정하게 들었다. 영국 외교부 관계자는 “테일러가 영국에서 징역형을 살 것으로 보인다”며 “형이 확정되면 수감 교도소가 정해질 것”이라고 전했다. 네덜란드는 영국과 수감협정을 맺고 있다.

1989년 반군 라이베리아애국전선(NPFL)을 이끌고 잔혹하게 정권을 장악한 군벌 지도자 테일러는 내전 종결 후 1997년 대통령에 선출됐다. 이후 다이아몬드 세계 최대 산지로 알려진 이웃국가 시에라리온으로부터 다이아몬드 공급권을 넘겨받는다는 대가로 시에라리온 반군단체 혁명연합전선(RUF)에 무기를 제공하며 적극 개입하기 시작했다. RUF는 소년병은 물론 소녀병까지 모집해 잔학행위를 부추겼으며 무고한 이들의 손발을 자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 손발이 잘린 사람만 8000명으로 추산된다. 11년(1991∼2002년)간 이어진 시에라리온 내전으로 12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테일러는 국내에서 반군이 일어나고 미국의 압력이 거세지자 권좌에서 물러나 2003년 나이지리아로 망명했다. 같은 해 시에라리온 반군에 의해 자행된 전쟁 및 반인륜 범죄를 주도하고 지시한 혐의 등으로 체포영장이 발부됐고, 2006년 체포돼 라이베리아 유엔 관할 유치소를 거쳐 헤이그 교외의 스헤베닝헌 교도소에 수감됐다. 2010년 재판 과정에서는 테일러가 세계적인 슈퍼모델 나오미 캠벨에게 무기 구매를 위해 불법으로 유통되는 ‘피의 다이아몬드’를 선물했던 사실이 드러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날 테일러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지자 시에라리온 수도 프리타운에서는 수천 명이 거리로 나와 국기를 흔들며 환호했다고 AFP가 전했다.

파리=이종훈 특파원 taylor55@donga.com
#라이베리아#찰스테일러#국제재판소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