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갑 찬 고수남, 공소장 낭독에 허공만 응시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4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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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美 총기난사 신문 법정 가보니

미국 오이코스대 총기난사 사건의 범인인 고수남이 사건 발생 이틀 만인 4일 법정에 모습을 드러냈다. 검찰은 7건의 살인과 3건의 살인미수 및 강도, 납치, 차량 탈취 등의 혐의로 이날 고수남을 기소했다. 그의 범죄가 인정되면 사형이 가능할 것으로 현지 언론은 내다봤다.

4일 오후 2시(현지 시간) 캘리포니아 주 오클랜드 시내에 위치한 앨러미다 카운티 지방법원 산하 와일리 매뉴얼 법정. 방청석 70석이 기자들로 가득 채워지고 일부는 서서 참관하는 가운데 샌드라 K 빈 판사 주재로 인정신문이 시작됐다. 고수남은 빨간 죄수복 차림에 수갑을 차고 출정했다. 다른 재판에 이어 오후 2시 10분경 고수남의 이름이 호명되자 법정은 숨죽은 듯 조용해졌다. 이 법정은 피고인석을 별도의 칸막이 방으로 만들어 놓아 방청객에선 피고인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빈 판사가 “진짜 이름이 원 고(One Goh) 맞느냐”고 묻자 고수남은 “예(Yeah)”라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피고인석 앞에는 국선변호인인 크라우스 씨가 서 있었다.

빈 판사는 고수남에 대해 사망자 7명에 대한 살인 혐의 등 범죄사실을 5분여에 걸쳐 조목조목 읽어 내려가면서 ‘흉악범죄’라고 규정했다.

법정 직원이 피고인석을 출입하는 과정에서 칸막이가 있는 피고인석 문이 열리자 고수남은 힘든 표정을 지었으며 허공을 쳐다보는 등 넋이 나간 듯 보였다. 법원은 고수남이 영어로 소통하는 것이 어려울 줄 알고 전문 통역사를 대기시켰지만 그가 통역이 필요 없다고 해 영어로만 재판을 진행했다. 고수남은 검찰의 기소문에 대해 침묵을 지켰다. 크라우스 변호사는 “고 씨가 범죄를 후회하고 있으며 아주 슬퍼하고 있다”고 말했다.

10여 분 동안 판사의 인정신문만 이어진 뒤 재판은 바로 끝났다. 다음 재판은 30일 열릴 예정이다. 고수남은 산타리타 교도소 독방에 수감돼 특별관찰을 받고 있다. 교도소는 15분 단위로 그의 동향을 체크하고 있다.

이 사건 주임검사인 낸시 오말리 검사는 오후 3시 법원 2층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번 사건은 앨러미다 카운티에서는 유례없는 ‘살인 광란’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피고는 45구경 캘리버 권총을 갖고 탄창 4개를 모두 채워 살인을 저질렀다”며 “그는 외로운 사람이자 실패한 인물이었지만 과거에는 다른 사람을 해칠 행동은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조사 결과 나타났다”고 말했다. 또 검사는 고수남이 학교에서 쫓겨난 게 아니라 스스로 그만뒀다고 밝혔다.

오클랜드=최영해 특파원 yhchoi65@donga.com  
▼ “화 못 참고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 ▼
■ 이웃들이 말하는 고수남


총기난사범 고수남은 고집이 세고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고수남이 아버지와 함께 한때 일했던 캘리포니아 주 데일리 시의 한인 마켓인 ‘국제마켓’에서 일하는 A 씨는 4일 기자와 만나 “고수남은 이곳 야채 코너에서 1년가량 일하다가 2년 전에 그만뒀다”며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으며 특히 히스패닉계들과 자주 싸워 말썽을 일으키곤 했다”고 말했다. 고수남은 집에서 자동차로 30분가량 떨어진 이곳에서 1년가량 일하다가 그만둔 뒤 뚜렷한 직업 없이 지냈던 것으로 알려졌다. A 씨는 “고수남의 아버지는 아직도 이곳 냉동부에서 일하지만 사고가 터진 뒤로 출근하지 않고 있다”며 “중년의 아들이 일자리 없이 지내는 것을 아버지가 옆에서 도와주는 게 쉽지 않아 보였다”고 전했다.

직원 B 씨는 “고수남이 이곳을 그만둔 이유도 주변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오클랜드 시내 고수남의 아버지가 사는 아파트는 노년층이 많이 사는 아파트였다. 이 아파트 11층에는 고수남의 아버지가 집 안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외부와의 연락을 모두 끊고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아파트 관리사무실에는 ‘기자 출입을 금지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고수남은 경찰에서 “영어를 잘 못해 왕따를 당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는 증언이 많이 나오고 있다. 이번 사건을 수사 중인 하워드 조던 오클랜드 경찰서장은 “고 씨가 분노를 조절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4일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또한 희생자 가운데 고수남을 괴롭힌 사람은 없었다는 증언이 많이 나오고 있다. 희생자 대부분은 고수남보다 더 어려운 형편에서 일과 학업을 병행해온 소수인종 출신 여학생들이다.

오이코스대 간호학과장 엘린 서빌런 씨는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고 씨가 서툰 영어 탓에 힘들었다는 보도는 사실이 아니다. 고 씨가 영어로 인한 문제로 놀림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서빌런 씨는 사건 당일 고 씨가 제일 먼저 죽이려고 인질을 잡은 채 찾아다녔던 사람이지만 사건 당일 오이코스대가 아닌 칼스테이트 이스트 베이 주립대에 강의를 하러 가 화를 면했다. 서빌런 씨는 간호학과를 중퇴한 고수남이 등록금을 전액 돌려달라고 했지만 이미 학기 절반가량을 다녔다는 이유로 거절했고 이 과정에서 심하게 말다툼을 했다. 고수남은 이후에도 서빌런 씨에게 등록금을 돌려 달라고 수차례 찾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오이코스대 간호학과 로미 존 델라리먼 교수는 “고 씨는 무엇을 가르쳐 주면 열성적으로 하는 학생이었다”며 “하지만 고 씨는 ‘직장이나 학교에서 여성과 일을 해본 적이 없다’고 말하곤 했으며, 여성들을 못 견뎌하는 편이었다. 간호학 수업을 들을 때 여학생들과 종종 문제를 빚곤 했다”고 말했다.

결국 고수남의 범행은 동료학생들의 왕따나 이민 부적응 등 구조적인 요인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화가 나면 제어하지 못하는 성격이 최근의 경제적 개인적 곤경과 맞물려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 무차별 살상으로 표출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오클랜드=최영해 특파원 yhchoi65@donga.com  
정윤식 기자 jy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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