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pay,no gain’… 계약사회 미국의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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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2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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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요금 75달러 안낸 집” 화재현장 출동한 美소방관 불구경만

주택에 불이 나 소방차가 출동했다. 하지만 현장에 도착한 소방관들은 불은 끄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다. 불난 집이 ‘소방 요금’을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이클 샌델 교수가 ‘정의란 무엇인가’ 강의 때 토론을 위해 제시했던 상황과 똑같은 일이 미국에서 실제로 발생했다.

11일 현지 지역 언론에 따르면 5일 오전 5시경 테네시 주의 한 외딴 농촌마을에 사는 비키 벨 씨의 이동식 주택에 불이 났다. 잠자던 그를 벨 씨의 애완견이 깨웠을 때 집 안은 이미 연기로 자욱한 상태였다. 겨우 몸을 추스르고 집을 탈출한 벨 씨는 즉시 ‘911’에 화재 신고를 했다.

신고를 받은 인근 소도시 사우스풀턴의 소방대원들은 즉각 현장에 도착했다. 소방트럭 등 화재 진압장비를 모두 갖춘 상태였다. 하지만 출동과정에서 벨 씨가 연간 75달러(약 8만6250원)의 소방 요금을 납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소방대원들은 차의 시동을 끄고 한가하게 도로 한편에 앉아 불구경만 했다. 벨 씨는 집과 가재도구가 잿더미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사우스풀턴 시의 이 같은 냉정한 소방정책은 20여 년 전 시작됐다. 벨 씨가 사는 마을은 시 경계 밖인 데다 외딴 오지라서 기본적인 소방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았다. 다만 이 지역 사람들에겐 매년 75달러를 내고 사우스풀턴 시 소방 서비스를 이용하는 옵션이 있었다. 하지만 주민들 다수가 ‘설마 내 집에 불이 나겠느냐’는 생각에 요금을 내지 않았다. 벨 씨도 그중 하나였다. 소방대원들은 벨 씨의 집이 ‘고객 목록’에 없는 것을 확인하고 화재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 대신 요금을 성실히 납부한 다른 이웃집에 불이 옮아붙는지만 면밀히 관찰했다. 소방당국의 이 같은 조치를 두고 “소방관의 사명을 저버렸다”는 비판이 미국 내에서 일고 있다.

하지만 시의 태도는 강경하다. 돈을 내지 않은 집들 불마저 꺼주면 돈을 낸 집과 형평성이 맞지 않는다는 논리다. 데이비드 크로커 사우스풀턴 시장은 “예외를 인정해 주기 시작하면 누구도 돈을 내지 않을 것이고 주민들의 소방 요금이 없으면 소방서 운영을 할 수 없다”며 “다만 재산이 아닌 인명 피해가 우려되는 경우라면 요금 납부 여부에 관계없이 긴급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지역의 소방정책은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발생하면서 논란거리가 된 바 있다. 지난해 9월 이 마을의 다른 집에서 발생한 화재 때도 소방당국은 출동만 했을 뿐 소방 요금을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화재 진압을 하지 않았다. 당시 집주인은 “불만 꺼준다면 지금이라도 얼마든지 돈을 주겠다”고 애원했지만 소방관들은 끝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화재 현장에서 요금을 받기 시작하면 어느 누구도 연간 정액요금을 미리 내지 않을 것이란 논리였다.

소방당국의 이런 냉정함에 주민들이 익숙해진 것일까. 벨 씨는 이후 지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시의 정책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소방당국에 악감정은 없다. 우리가 목숨이라도 건진 것과 소방차가 출동해 불이 다른 집으로 번지지 않게 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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