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폭탄 재앙에 폭우마저… 주말 ‘방콕 사수’ 시민들 총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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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0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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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희진 기자 태국 수해현장 르포

물길된 도로 28일 태국 수도 방콕의 짜오프라야 강을 지나는 프라삔까오 다리. 홍수로 마을 대부분이 물에 잠긴 방콕 서부의 방플랏 주민들이 군용트럭에 탄 채 귀중품을 가지러 마을로 다시 들어가고 있다. 방콕=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물길된 도로 28일 태국 수도 방콕의 짜오프라야 강을 지나는 프라삔까오 다리. 홍수로 마을 대부분이 물에 잠긴 방콕 서부의 방플랏 주민들이 군용트럭에 탄 채 귀중품을 가지러 마을로 다시 들어가고 있다. 방콕=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그러지 않아도 최악의 침수 공포 속에 휩싸인 방콕에 28일 밤이 되면서 비가 쏟아졌다. 1주일 동안 이어진 맑은 날씨를 깨는 갑작스런 폭우였다.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는 1시간여 만에 그쳤지만 시민들은 불안감에 떨며 크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북쪽에서 흘러온 강물과 타이 만의 만조가 만나 방콕이 최악의 날(Dooms Day·둠스데이)을 맞을 수 있다는 경고 속에 내린 폭우였다.

오후 내내 외출을 피하는 주민과 여행을 취소한 관광객 때문에 세계적인 교통체증의 지옥이라 불리는 방콕 시내 도로는 막힘이 없었다. 거리에서 만난 고맨 씨(53)는 “설날 연휴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시내 지하철은 정상 운행됐지만 관광명소를 지나는 버스들은 텅텅 비었다. 대표적 관광명소인 짜오프라야 강 근처의 왕궁은 이날 오전 30분 정도 왕궁 입구까지 물이 반 뼘 정도 차올랐다.

발목 높이까지 차오른 물이 군인들이 쌓아놓은 모래벽을 뚫고 왕궁 안으로 스며들었다. 이날 한 택시운전사는 왕궁 주변에서 길이 2m에 이르는 뱀을 잡았다. 주민들은 북부의 악어 농장에서 악어 100여 마리가 쓸려 내려왔다는 소식에 ‘악어 공포’에도 빠져 있다. 홍수 피해가 보도되며 이곳을 찾는 관광객은 절반으로 줄었다. 왕궁 안내인은 “보통 하루 7000명이 찾는데 어제 4000명으로 줄더니 오늘은 3000명도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왕궁에서 5분 정도 걸어서 도착한 짜오프라야 강 부근은 강물이 무릎까지 차올랐다. 강 근처 노점상인들은 물 퍼 나르기를 포기한 채 모래주머니만 쌓고 있었다. 상인 대부분은 “오늘 밤이 고비가 될 것”이라며 철시를 준비했다. 서민들의 교통수단인 수상버스가 운항되는 타창 선착장에는 24일부터 11월 7일까지 버스 운항을 하지 않는다는 공고문이 붙어있었다. 수상버스 회사 짜오프라야 익스프레스 직원인 미수타마 씨는 “평소에 비해 강의 수심이 3m 차이가 나며 오늘 오전 강물이 수위를 살짝 넘었다”고 말했다. 아시아재해대비센터(ADPC)의 수문학자인 추싯 씨는 “짜오프라야 강의 범람 여부를 단정할 순 없지만 희망적이지 않다”며 “결국 기댈 수 있는 건 시간이며 차오른 물이 빠지도록 기다리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선착장을 지나 피해가 심각한 것으로 알려진 방콕 서부의 강변 마을인 방플랏에 가기 위해 프라삔까오 다리에 이르자 경찰이 입구를 막아섰다. 일반 트럭과 지프차, 군용트럭 등이 번갈아가며 사람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3일 전 가옥 대부분이 침수된 후 방플랏 주민들은 다리를 오가며 귀중품을 하나씩 실어오고 있었다. 트럭을 타고 방플랏 인근에 도착하니 이곳은 ‘수상마을’에 가까웠다. 주민 실라폰 씨(53)는 “3일 전 집에 물이 허리춤까지 차올라 지갑만 들고 뛰쳐나왔다”며 “물이 차기 전 자가용을 트럭에 실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프라삔까오 다리 위에서 만난 피차이 라따꾼 전 방콕 시장은 “예년보다 너무 많이 내린 비, 낡은 관개 시설, 정부의 늑장 대처가 이번 홍수 피해의 세 가지 원인”이라며 “서서히 한계 수위에 도달해가는 짜오프라야 강을 지켜보는 것은 절망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방플랏 지역에서는 악취가 진동하는 무릎 높이의 물이 가옥들을 덮쳐 주민들이 가재도구를 머리에 이고 다니는 장면이 목격됐다. 마을의 한 병원에선 의사와 간호사들이 병원을 보호하기 위해 모래로 제방을 쌓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수폿 숨리트바니트차 원장은 “어제는 만삭 임신부를 보트로 긴급히 후송했다”고 말했다. 물은 인구가 밀집해 있는 방콕 차이나타운의 일부 거리까지 들이찼다.

대탈출 행렬이 이틀째 이어진 이날 남쪽으로 가는 일부 도로에서 자동차들은 거북이 속도로 움직였다. 이들은 대부분 홍수 위기에서 벗어나 있는 도시 남부지역으로 향했다. ‘뚝뚝’(태국의 3인승 소형택시) 기사들은 물 때문에 더는 운전이 불가능해지자 아예 운전석에서 내려 차를 밀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방콕을 빠져나갔는지는 이를 모니터링 하는 교통 장비마저 침수돼 집계가 되지 않고 있다. 다만 1000만 명의 방콕 시민 상당수는 삶의 터전이 홍수에 떠내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동네를 지키는 모습이었다.

홍수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태국 경제와 산업, 기간시설의 피해도 가시화되고 있다. 태국 중앙은행은 28일 홍수 사태의 영향으로 올해 태국 성장률이 기존에 전망한 4.1%에서 2.6%까지 떨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중앙은행은 “홍수 사태가 농업뿐 아니라 제조업에도 영향을 미쳐 4분기 성장률을 크게 갉아먹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또 방콕포스트는 이날 방콕 북단의 돈므앙 공항이 90%가량 잠겼다고 보도했다.

염희진 기자
염희진 기자
태국 정부는 바닷물의 만조가 29일 정점에 이를 것으로 보고 피해 최소화를 위해 총력전을 벌이고 있다. 태국 국방부는 시민들의 피난을 위해 군 병력 5만 명과 보트 1000척을 투입하는 한편 10만∼2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간이 대피소를 세울 예정이다.

잉락 친나왓 총리는 방콕 동쪽의 일부 도로를 파헤쳐 수로로 전환해 물이 빠져나가는 속도를 빠르게 하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수깜뽄 수완나탓 교통장관은 “강물의 유입을 막기 위해 도로를 파헤치는 것은 교통체증만 낳을 뿐 좋은 해결책이 아니다”며 반대해 논란이 예상된다.

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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