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앞에서는 악마도 무기력한 인간에 불과했다. 세르비아 북부 라자레보에서 도피 16년 만에 검거된 특급 전범 라트코 믈라디치(69)가 26일 베오그라드 특별법정에 느린 걸음으로 나타났다. 검은색 야구모자를 눌러쓰고 감색 재킷을 입었는데 노쇠한 기색이 완연했다. 보스니아 내전 당시 8000여 명의 무고한 인명을 학살했던 장본인이라 믿기에는 너무도 허약한 모습을 연출했다.
하지만 세르비아 사법부는 믈라디치를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국제유고전범재판소로 송환하기로 27일 결정했다. 마야 코바체비치 판사는 이날 2차 송환심리를 마친 뒤 “송환을 위한 조건들이 충족됐다”며 “믈라디치의 건강 상태도 재판을 받기에 충분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믈라디치 변호인 측은 전날 1차 심리에서 “믈라디치의 몸 상태가 매우 나빠 현재 어떤 대화도 불가능한 상태”라고 재판부에 건강문제를 집중 제기했다. 믈라디치는 이날 딸기와 러시아 문학책을 자신이 갇힌 방으로 보내 달라고 요구했다고 외신은 전했다. 또 자신의 딸이 묻힌 묘지에 가고 싶다고 했다.
브루노 베카리치 전쟁범죄 수석검사는 “믈라디치가 쉬운 질문에도 답변하지 못한 것은 ‘쇼’”라고 말했다. 세르비아 당국은 믈라디치를 지지하는 일부 민족주의자가 과격한 행동에 나설 것에 대비해 늦어도 일주일 내에 유고전범재판소로 이송할 계획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프랑스 일간 르몽드는 “믈라디치의 재판이 시작되기까지 우선 수개월이 소요되고 앞으로 수년 동안 지루한 재판이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또다시 멀고 먼 여정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한편 세르비아 당국은 “믈라디치가 검거될 때 권총 2개를 갖고 있었지만 저항 없이 순순히 체포에 응했다”면서 “거의 집 밖을 나가지 않았는지 창백한 모습이었다”고 밝혔다.
파리=이종훈 특파원 taylor55@donga.com 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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