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개월 이상 이어진 코트디부아르(아이보리코스트) 사태가 11일 로랑 그바그보 전 대통령의 체포로 일단 막을 내렸다. 하지만 뿌리 깊은 남북 갈등과 내전의 상처가 깊어 “끝이 아니다”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내전을 벌였던 양측은 12일에도 경제수도 아비장에서 중화기를 동원한 격렬한 전투를 계속했다. 코트디부아르의 미래를 Q&A로 알아본다.
Q. 10년 내전의 배경은….
A. 그바그보는 2000년 대선에서 승리하며 대통령이 됐다. 그는 민주화를 외치며 40년간 이어진 일당 독재를 종식한 정치영웅이었다. 당시 국민들은 국가의 새로운 미래가 열릴 것으로 기대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그바그보의 당선은 그 후 10년이나 이어진 ‘핏빛 내전’의 서막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코트디부아르는 남북 간에 고질적인 지역 종교 민족 간 차이가 심했다. 북쪽에는 인접국인 부르키나파소 등에서 건너온 외국인이 많이 살았으며 이들은 남쪽 사람들로부터 정치, 경제적인 차별을 당해왔다. 지난해 12월 대선에서 승리한 알라산 우아타라 대통령(당선자)도 외국(부르키나파소) 출신이라는 이유로 2000년 대선 출마를 거부당한 바 있다. 그바그보는 남쪽을, 우아타라는 북쪽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여기에 북쪽은 이슬람교, 남쪽은 프랑스 지배의 영향에 따른 기독교가 각각 주류를 이뤄 종교 갈등도 심했다. 이 같은 남북 갈등은 2000년 그바그보가 집권한 후 북쪽 사람들에 대한 차별정책을 더욱 심하게 펴면서 급기야 2002년 내전으로까지 번졌다. 이후 내전은 수차례 휴전과 재발을 거치며 만성화됐다.
Q. ‘민주혁명’인가, 내전인가.
A. 그바그보는 선거에서 패했음에도 권력이양을 거부하다가 체포됐기 때문에 서방의 이번 개입은 아프리카의 ‘절차적 민주주의’를 한 단계 성숙시켰다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내전 과정에서 그바그보 측뿐 아니라 우아타라 측도 상대방에 대한 처참한 살육과 보복을 일삼아 과연 이번 일을 ‘민주혁명’으로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국제인권단체는 국제사회에서 정당성을 부여받았던 우아타라 측 부대가 그바그보를 지지하는 민간인 수백 명을 살해, 성폭행했다는 폭로를 했었다. 우아타라 주도 정부에 대한 도덕성 논란이 끊이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초콜릿 원료인 코코아 전 세계 생산량의 40%를 차지하는 코트디부아르의 민주화의 진전이라는 점에서 ‘초콜릿 혁명’이라 부를 만하지만 내전의 그늘도 그만큼 큰 것이다.
Q. 남은 과제는….
A. 코트디부아르는 내전 발발 이전만 해도 ‘아프리카의 기적’, ‘서아프리카의 남아공’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주목을 끌었다. 코코아는 물론 원유 커피 고무 등도 풍부해 아프리카에서 가장 유망한 투자처로 손꼽혔다. 특히 이웃나라인 나이지리아 가나 라이베리아 등이 쿠데타와 내전으로 고통 받는 동안 1960년 독립 이후 친(親)프랑스 정권하에서 상대적으로 긴 평화 시대를 이어왔다. 하지만 이후 10년간의 내전이 이 모든 이점을 앗아가고 경제를 ‘올스톱’시켰다. 우아타라 정부가 피폐해진 경제를 재건하지 못한다면 또다시 심각한 민심 이반을 불러올 가능성이 크다. 긴 내전을 치르는 동안 쌓인 지역, 부족 간 갈등을 치유하면서 국가화합을 도모하는 것도 쉽지 않은 과제다.
Q. 국제 사회 반응은….
A. 우아타라 측을 지지해온 국제사회는 사태가 종료된 것에 대해 환영의사를 밝히면서도 내전이 가져올 후유증을 걱정하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의지의 승리”라고 말했고 영국과 프랑스 독일 외교부도 “코트디부아르가 이제 진정한 민주화 기회를 얻게 됐다”고 논평했다. 특히 이번 내전에 깊숙이 개입한 프랑스는 아프리카에서의 영향력을 다시 확인한 계기가 됐다. 다만 러시아 등 일부 국가에선 “서방이 개별 국가 문제에 개입해 한쪽 편만 들면서 중립성을 상실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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