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모총장 - 중앙銀총재 - 대선후보 희생… “戰後 최대 비극”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4월 12일 03시 00분


■ 슬픔에 잠긴 폴란드

대통령궁 앞 추모인파 운집… 꽃 깔린 거리에 장송곡 흘러
정부 “애도에 좌 - 우 없다”… 반러감 정-국론분열 경계
자유노조 파업 이끈 여걸과 망명정부 마지막 수반도 숨져


슬퍼하기에는 너무 화창한 봄날, 폴란드는 전국이 애도 물결로 뒤덮였다. 기자가 11일 바르샤바 프레데릭 쇼팽 공항에서 탄 택시는 구시가지에 있는 대통령궁에 훨씬 못 미쳐 멈춰야 했다. 워낙 많은 사람이 대통령궁 앞에 몰려들고 있어 그 앞으로 통하는 길로는 차들이 다닐 수 없었다. 시민들 손에는 폴란드 국기를 장식하는 두 색인 붉은색과 흰색의 장미와 촛불이 들려 있었다. 대통령궁 앞은 말 그대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곳곳에 장미와 촛불의 바다가 펼쳐졌다. 스피커에서는 쇼팽의 장송행진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궁에는 조기가 게양됐고 바르샤바 주택가 곳곳에도 폴란드 국기가 내걸렸다. 이날 정오 추모 사이렌이 울려 퍼져 전역이 침묵 속에 빠졌다. 궁 밖에 있던 수천 명의 사람이 2분 동안 고개를 숙이고 희생자들을 애도했으며, 거리의 운전자들도 운행을 멈추고 차에서 내려 애도를 표했다.

공항을 막 빠져나오는 길에 외신 기자들이 몰려 있었다. 레흐 카친스키 대통령의 시신이 들어오고 있었다. 오후 3시 반경 기자가 묵은 호텔방 창밖으로 수많은 시민이 중앙광장 로터리에 도열해 대통령의 시신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통령궁 앞에서 만난 대학생 올가 씨는 “우리는 오늘 모두 여기에 올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택시 운전사 크쥐스토프 씨는 “난 카친스키 대통령보다 도날트 투스크 총리를 지지하는 사람이지만 오늘만큼은 모두 같은 폴란드인”이라고 말했다.

러시아와 독일 사이에 끼어 수많은 슬픈 역사를 지닌 폴란드에 다시 불행이 닥쳤다. 한 번의 사고로 대통령 부부와 참모총장, 중앙은행 총재 등 정관계와 군 수뇌부가 한꺼번에 사망한 것은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 게다가 일행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군이 폴란드인 2만2000여 명을 학살한 ‘카틴 숲 학살’ 사건 추모식을 위해 러시아로 향한 길이어서 폴란드 국민들의 슬픔은 더했다.

공산치하에서 반체제 인사였고 역사가이기도 한 아담 미쉬니크 씨는 폴란드 일간지 가제타 비보르차에 기고한 글에서 “이 슬픔의 감정은 정치적 당파의 차이를 초월하는 집단적인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폴란드를 위해 공동의 책임을 지고 있다”고 썼다.

폴란드는 교황(고 요한 바오로 2세)을 배출했을 만큼 가톨릭 신앙이 강한 국가. 특히 이날 주일미사에는 각 성당에 빈틈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측근이었던 스타니슬라프 지비슈 추기경은 바벨 왕립 대성당에서 집전한 미사를 통해 “형제자매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10일 오후 8시 30분에는 바르샤바의 필수드스키 광장에서 추모 행사가 있었다. 197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그리고 2006년 현 교황인 베네딕토 16세가 미사를 집전했던 유서 깊은 장소다. 폴란드 정부는 일주일간 애도 주간을 선포했다.

대통령 권한대행인 브로니슬라프 코모로프스키 하원의장도 “우리 모두 한마음으로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있다”면서 “여기에는 좌도, 우도 없다. 이런 비극 앞에 우리는 하나”라고 말했다. 자칫 이번 사고 이후 반러시아 감정이 격화되거나 각 정당이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등 국론이 분열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한편 이번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 중에는 폴란드를 이끌어가는 정신적 지도자들과 엘리트들이 대거 포함됐다. 리샤르트 카초로프스키 씨(90)는 영국 런던에서 45년간 지속해온 폴란드 망명정부의 마지막 대통령(1989∼90년). 프란치셰크 공고르 군참모총장(59)은 2004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및 유럽연합(EU) 폴란드군사대표 등을 거쳐 2006년 현직에 임명됐다. 스와보미르 스크지페크 중앙은행 총재(46)는 2007년 1월 취임한 후 폴란드의 통화정책을 이끌어온 핵심 인물. 국방장관을 지낸 알렉산데르 슈치글로 국가안보국장(46)과 올해 대통령 선거후보로 나선 예지 슈마이진스키 하원 부의장(58)도 희생됐다.

또 폴란드 자유노조의 대모 역할을 한 여성 안나 발렌티노비츠 씨(80)도 숨졌다. 그는 1978년 당시 불법 단체였던 그단스크 노조 활동에 뛰어들었고 1980년 7월 반체제 활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해고됐다. 조선소 노동자들이 그의 해고에 반발해 파업을 시작했던 것이 폴란드 자유노조 활동의 시작이었다.

바르샤바=송평인 특파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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