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 K에게 무슨 일이…독일 한 첩보요원 체포 사건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1월 19일 14시 18분


지난달 초 독일 뮌헨 인근의 한 기차역. 기차에서 내리던 한 남자가 두 명의 사복 경찰관에게 갑자기 체포됐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철저한 몸수색이 이뤄진 뒤 경찰관들은 그에게 수갑을 채웠다. 이어 대기 중이던 차를 타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역에서 이를 지켜보던 그의 지인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안톤 K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뒤늦게 언론 등을 통해 알려진 K의 혐의는 독일 연방정보국(BND)의 해외 첩보요원으로서 정부의 기밀을 유출했다는 것. 그가 근무했던 코소보 현지의 동성애자 애인인 뮤렛 A도 비슷한 시기에 체포됐다. 이들에 대한 재판이 시작된 18일 슈피겔을 포함한 독일 언론들은 "스파이의 사랑과 섹스, 아내의 배신이 얽힌 영화 같은 이야기가 법정에 오르게 됐다"고 보도했다. 재판 결과가 어떻게 나오느냐와 상관없이 BND가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사건의 시작은 K가 코소보의 수도 프리슈티나로 발령받은 2005년 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파견 외교관 신분으로 행세하며 코소보 주요 인사들과의 네트워크 구축 및 정보 확보 업무를 시작했다. 어깨까지 머리를 기르고 옷차림도 바꿔가며 비밀스럽게 움직이던 어느 날, 그는 거리의 카페에서 완벽한 남부 독일어를 구사하는 20대 중반의 한 청년을 만났다. 그는 자신이 마케도니아-알바니아 출신이지만 독일 남부 오펠베르크에서 성장했다는 이야기를 하며 말을 걸어왔다. 호감을 느낀 K는 "A를 현지 통역으로 쓰겠다"며 BNA 본부에 요청해 승인을 받았다.
업무상 시작된 관계는 곧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했지만 이를 본부에 보고하지 않고 비밀로 숨겼다. 2년 넘게 계속돼온 관계는 순탄해 보였다. K의 업무 능력에 만족한 BND는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그의 업무를 2009년까지 2년 추가 연장했다. 하지만 그 직후 K와 심하게 다툰 부인이 "남편이 나를 보험 대상에서 빼고 대신 A를 집어넣었다"고 BND 본부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K의 '불륜'은 들통이 났다.
조사에 착수한 BND는 K가 BND의 구조와 업무 활동, 코소보에서 얻은 첩보 등을 A에게 유출시킨 혐의로 그를 긴급 체포했다. 영국 등 유럽의 다른 파트너 정보국에서 얻은 기밀정보를 '베개머리 대화'로 유출시켰다는 혐의도 추가했다. A가 알바니아와 마케도니아의 정보국과 연관이 있고 범죄조직에도 연루됐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문제가 커졌다. 통역 수당으로 1만4700유로를 부당하게 추가 청구한 점도 드러났다.
하지만 A와 K의 변호인단은 문제의 정보들이 국가 기밀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또 A가 범죄조직을 접촉한 것은 K의 요청에 따라 범죄조직의 첩보를 입수하기 위한 전략적인 업무 일환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이번 사건이 동성애에 부정적인 정보기관의 편견과 차별을 드러냈다"며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K의 유죄가 인정되면 BND로서는 첩보요원의 사생활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몇 년간이나 방치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무죄 선고가 나올 경우에도 "(동성애 등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혀 쓸데없는 소송에 국가 자원과 에너지를 낭비했다"는 비난에 시달릴 판이다. 슈피겔지는 "유죄든 무죄든 BND로서는 난감한 입장에 처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라며 "정보기관의 신뢰를 떨어뜨릴 어두운 단면이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이정은기자 lightee@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