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연수 리포트]잇단 스캔들에 눈총… 흔들리는 미국내 ‘유대인 파워’

  • 입력 2009년 9월 12일 02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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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21일부터 8일 동안 계속된 유대인의 하누카 명절을 기념하는 촛불 점등식이 미국 백악관 앞에서 열렸다. 조슈아 볼턴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이 유대교 성직자인 랍비들과 함께 점등식에 참가했다. 미국 권력의 상징인 백악관 앞에서 유대인 명절인 하누카를 기념하는 행사가 열리는 것은 미국 유대인들의 힘을 그대로 보여주는 상징이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2008년 12월 21일부터 8일 동안 계속된 유대인의 하누카 명절을 기념하는 촛불 점등식이 미국 백악관 앞에서 열렸다. 조슈아 볼턴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이 유대교 성직자인 랍비들과 함께 점등식에 참가했다. 미국 권력의 상징인 백악관 앞에서 유대인 명절인 하누카를 기념하는 행사가 열리는 것은 미국 유대인들의 힘을 그대로 보여주는 상징이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유대인의 수는 저 찬란한 은하수 가운데 작은 별 하나처럼 적지만, 그들은 항상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화제가 된다.” 19세기 미국의 대표적 작가 마크 트웨인은 ‘유대인에 관하여’란 글에서 유대인들의 특징을 이같이 압축적으로 표현했다. 신대륙 미국에 건너온 유대인들은 21세기에 들어서도 여전히 ‘관심과 화제’의 대상이다. 미국 사회를 움직이는 정치 경제 미디어 교육계 등 네트워크 곳곳에 유대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아직도 유대인들이 주연으로 등장하는 온갖 음모론의 불씨가 꺼지지 않는 배경엔 이런 유대인 파워가 깔려 있다. 하지만 지난해 하반기 미국을 강타한 금융위기로 유대인 사회는 시련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유대인 파워의 기둥인 재정은 물론 유대인 사회를 이어주는 신뢰의 위기가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미국 유대인들의 제2의 고향인 뉴욕에서 유대인 사회의 빛과 그늘을 들여다봤다.》

사상 최대규모 다단계 금융사기에 재정 악화-반감 확산… 위기 맞아
美기밀 이스라엘 유출도 악재… 역풍 극복 영향력 회복할지 관심

○ “별 하나처럼 적지만 항상 관심을 끈다”

지난해 12월 말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기자는 뉴욕 주 롱아일랜드의 한 중학교에서 열린 음악회에 참석했다. 이 학교에 자녀가 다니는 학부모들을 초청한 행사였다.

학생들이 합창을 하는 순서였다. 첫 곡은 평소 귀에 익숙한 크리스마스 캐럴이 나올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실제 학생들이 부른 노래는 생소했다. ‘하누카’란 제목이었다.

옆에 앉은 한 학부모에게 ‘하누카’의 뜻을 물어봤다. ‘하누카’는 기원전 4세기 유대인들이 독립전쟁을 벌여 예루살렘을 되찾은 날을 기념하는 유대인들의 명절이었다. 유대인들은 여전히 크리스마스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명절인 하누카를 고수한다. ‘기독교 나라’로 불리는 미국의 중심인 뉴욕에서 유대인 기념일을 기리는 노래가 울려 퍼진 것이다.

이처럼 유대인들이 밀집해 있는 뉴욕 뉴저지 일대에서 ‘유대인 파워’를 경험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웬만한 주요 대학이나 기업에서 유대인 명절은 평일인데도 휴일이나 다름없었다.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의 한 교수는 “뉴욕 뉴저지에 있는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나 대학 수뇌부의 상당수가 유대인이다”며 “평일이더라도 자신들의 명절엔 쉬기 때문에 그날에 일반 직원들도 쉬는 일이 많다”고 말했다.

미국 전체 유대인은 527만 명 정도. 뉴욕 뉴저지를 비롯해 캘리포니아 플로리다 일리노이 등 몇 개 주에 밀집해 있다. 미국 전체 인구 3억146만 명 중 1.7%에 불과하다.

이는 1000만 명에 육박하는 아시아계와 비교하면 절반 수준이다. 3000만 명이 넘는 흑인이나, 1700만 명의 히스패닉들에 비하면 그 수는 초라할 정도다. 하지만 유대인 파워는 단순 수치로 비교할 수 없다.

미국 의회권력의 열쇠를 쥔 연방 상원의원 중 유대인은 15명이다. 전체의 15%를 차지하고 있다. 연방 대법관 9명 중 2명이 유대인이다. 미국 대기업 CEO 중 17.5%가 유대인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의 유력 일간지인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월스트리트저널’의 경영진과 주요 필진의 35% 정도가 유대인이다. TV 방송망에서도 비슷하다고 한다.

빌 클린턴 정부 8년 동안 각료나 각료급 공직에 진출한 유대인은 12명이나 됐다. 조지 W 부시 집권 시절 폴 울포위츠 국방부 차관 등은 유대계 ‘네오콘’이었다. 버락 오바마 정부의 ‘실세’인 람 이매뉴얼 대통령비서실장은 이스라엘 의용군으로 참전했던 유대인이다.

○ ‘개와 유대인 출입금지?’

6월 10일(현지 시간) 워싱턴 시내 홀로코스트 박물관 경비원이 총기로 살해된 사건이 발생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학살된 유대인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지어진 이 박물관은 백악관에서 직선거리로 불과 500m 정도 떨어진 워싱턴의 중심부에 있어 사건의 충격은 더욱 컸다.

80대의 범인 제임스 폰 브런은 백인우월주의자로 알려졌다. 그가 홀로코스트 박물관을 범행 장소로 삼은 이유는 유대인들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유대인·흑인 검사에 의해 나에게 유죄가 구형됐고 유대인 판사에 의해 감옥에 갔다”고 유대인 등에 대한 극도의 반감을 드러냈다. 사건 직후 한 랍비는 “미국에 반유대주의의 악감정이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진단했다.

클린턴 정부 시절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부 장관은 뒤늦게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장관직을 노리고 유대인이라는 점을 숨겼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아직 미국 사회에서 유대인에 대한 부정적 평판이 남아 있다는 증거였다. 실제 몇십 년 전만 해도 뉴욕의 일부 식당에선 ‘개와 유대인 출입 금지’라는 팻말이 버젓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지난해 발생한 최악의 금융위기에서 유대인 버나드 메이도프가 벌인 사상 최대의 다단계 금융사기 사건은 미국 내 유대인들에 대한 평판을 떨어뜨린 대형 ‘악재’였다.

피해 규모만 500억 달러에 이르는 이 사건으로 많은 유대인과 유대인 단체가 직격탄을 맞았다. 뉴욕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메이도프의 주 고객들이 뉴욕의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는 “이번 사건으로 유대인들은 심한 배신감과 수치심을 느꼈다”고 보도했다.

○ 넘어야 할 산은 많다

3월 1일 뉴욕의 대표적 유대인단체인 유대인 커뮤니티 위원회(JCRC)가 주최한 한 조찬행사엔 연방 하원의원 12명과 커스틴 길리브랜드 상원의원(민주)이 참석했다.

한 참석자는 “메이도프 사기 사건으로 유대인 커뮤니티가 운영하던 자선기금의 대부분이 사라졌고, 수많은 사람이 재정적인 기반을 잃었다”고 개탄했다. JCRC의 마이크 밀러 회장은 “유대인 커뮤니티의 전체 재정이 최소한 앞으로 15%는 줄어들 것이다. 그동안 유지해오던 각종 프로그램을 줄일 수밖에 없다”고 걱정하기도 했다.

유대인 파워의 원천인 경제 기반이 흔들리면 그들의 위상도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미국 유대인들이 메이도프 금융사기 사건의 후폭풍을 우려하는 이유다.

미국유대인공공정책위원회(AIPAC)도 최근 간부 2명이 미국 국가 기밀을 이스라엘 외교관에게 누출했다는 혐의로 미 연방수사국(FBI)에 의해 기소됐다. AIPAC는 탁월한 자금력과 로비력으로 미국 정부와 의회를 상대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같은 사건으로 불거질 반유대 정서는 이 단체의 위상에 상당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지난해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유대인들은 오바마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듯한 그의 종교 배경을 문제 삼았기 때문이다. 이후 오바마 대통령의 행보에 상당수 유대인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이고 있다. 특히 그들의 모국인 이스라엘에 위협적인 이란의 핵무장을 바라보는 오바마 대통령의 ‘유연한’ 태도가 우려스럽다고 한다.

이철우 한미공공정책위원회 위원장은 “유대인들이 전지전능하게 미국의 정재계 등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생각은 실상을 잘 모르는 얘기”라며 “지금 유대인들이 역풍을 헤치고 과거와 같은 영향력을 발휘할지는 두고 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뉴욕=정연욱 차장 jyw11@donga.com

‘높은 교육열’ 닮았지만 ‘편가르기’ 없는 점 달라

■ 유대인, 한인과 비교해보면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에서 석사과정에 재학 중인 유대계 대니얼 씨(25). 한국 교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 뉴욕 지역에서 자라다 보니 어릴 때부터 한국 관련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한국인들의 생활방식을 지켜볼 일도 많았다.

대니얼 씨가 꼽은 유대인과 한국인의 대표적 공통점은 높은 교육열이다.

“저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에게서 ‘열심히 공부하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지겨울 정도였죠. 또 부모님은 커서 법률가, 심리학자, 의사 등 전문직업을 택하라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나중에 한국인 친구들을 만나 보니 그들도 부모님에게서 비슷한 얘기를 자주 들었다고 하더군요.” 그는 “뉴욕 지역에 한국의 ‘기러기’ 가정이 많은 것도 한국인들의 높은 교육열 때문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실제로 미국 유대인들은 의사나 변호사, 교사 등 전문직종에 많이 진출하고 있다. 전문직에 종사하는 미국인은 평균 15% 정도이지만 유대인들의 전문직 종사비율은 40% 수준으로 훨씬 높은 편이다. 이는 유대인들이 미국 사회의 상층부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표로 통한다.

또 유대인들이 미국에 건너와 시작한 사업 중 한국 교민들이 이어받은 게 많다. 간단한 잡화나 음식을 파는 델리를 비롯해 세탁소와 꽃가게 등이 대표적이다. 많은 교민이 뉴욕 맨해튼과 그 주변에서 이 같은 가게를 시작해 사업기반을 넓혀가고 있다.

하지만 유대인 사회와 비교해 교민 사회가 안고 있는 그늘도 없지 않다. 가족 문화가 강한 유대인 사회에서 커뮤니티 차원의 갈등은 드러나지 않지만 한인 교민 사회에선 정치 현장을 방불케 하는 편가르기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교민 사이에 깊어진 감정의 골은 사회 문제로 번지고 있다.

올 초 실시된 뉴욕 한인회장 선거는 치열한 3파전으로 치러져 한국 선거의 ‘축소판’으로 불렸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이례적으로 2개 면에 걸쳐 뉴욕 한인회장 선거를 특집으로 다루면서 “이번 선거에 각 후보는 적어도 수십만 달러를 사용하고 있다”고 꼬집기도 했다.

이 기사는 지난 1년간 삼성언론재단의 후원으로 미국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에서 연수한 정치부 정연욱 차장의 보고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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