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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9년 9월 7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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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위기? 글쎄…. 여긴 그런 것 없다.” 지난달 17일 오전 10시 브라질 상파울루의 전통시장인 빈치싱쿠 지 마르수에서 만난 세르지우 자하르 씨(65)는 경제위기로 인한 변화를 묻자 이렇게 답했다. 빈치싱쿠 지 마르수는 3000여 개의 상점이 몰려있는 브라질 최대의 상가 밀집지역.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노점상들은 속옷과 액세서리에서 불법 복제CD까지 각자 보따리에 챙겨온 물품들을 늘어놓고 손님을 부르고 있었다. 시장 중심가에서 화장품가게를 운영하는 자하르 씨는 입구에서 손님을 맞는 종업원을 새로 채용했다. 몇 달 사이 매출이 20% 정도 늘었기 때문이다. 40평이 채 안 되는 가게에 종업원만 6명. 그는 “올해 들어 주변에만 화장품가게 3개가 새로 생겼다”며 “손님이 늘다 보니 창고까지 매장으로 개조되고 있다”고 말했다.》
보따리상들도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다. 경제위기 이후 정부 지원금과 최저임금이 인상되면서 저소득층 대상의 매출이 갈수록 늘고 있다. 상파울루에서 구매한 의류를 인근 도시에 팔고 있는 보따리상 마리 스텔라 씨(46·여)는 “한번 상파울루에서 물건을 사면 일주일간 팔았지만 지금은 3, 4일이면 동이 난다”고 말했다.
경제위기의 잿더미 속에서 가장 먼저 원기를 되찾고 있는 선두주자는 아시아와 남미의 신흥국들이다. 그 가운데서도 브릭스(BRICs)의 주축을 이루는 중국과 인도, 브라질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 더 뜨거워진 내수시장
경제위기로 세계 자동차 판매시장이 크게 휘청거렸지만 그에게는 ‘먼 나라 얘기’일 뿐이다. 인도 자동차시장은 지난 1년간 오히려 확대됐다. 업계 1위인 마루티 스즈키의 올 8월 자동차 판매는 지난해에 비해 29%, 2위인 현대차는 13% 증가했다. 세드 씨는 “가계소득이 늘면서 사람들은 목돈이 생기면 먼저 자동차를 산다”며 “요즘 인도에선 두 대 이상의 자동차를 가진 가구도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자동차시장만 커진 것이 아니다. 인도의 휴대전화 가입자는 최근 9개월 연속으로 1000만 명 이상씩 증가했다. 지난해 12월부터 인도 정부가 도로 및 주택 건설과 농촌 지원 등으로 5조6000억 루피(약 1150억 달러)를 쏟아 부은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는 평가다.
브라질과 중국 역시 내수 성장세가 눈부시다. 중국 농촌 여성 리후이(李輝·23) 씨는 “경제위기라지만 중국의 생활수준은 계속 높아지고 있는 것 같다”며 흐뭇해했다. 결혼을 앞둔 리 씨는 정부의 도움으로 혼수품을 싸게 구입할 수 있었다. 중국은 농촌지역 거주자들이 가전제품을 살 때 구입비를 보조해 주는 ‘가전하향(家電下鄕)’ 정책을 펴고 있다. 리 씨는 “가전하향 정책으로 평소 부담스러웠던 가격의 LG TV를 혼수품으로 살 수 있게 돼 무척 기쁘다”고 말했다.
○ 첨단 제조업도 약진
중국 우한(武漢)에서 왕위진(王昱錦·27) 씨가 운영하는 온라인게임 회사 산코소프트웨어는 4년 만에 2개의 사무실을 두고 160여 명의 직원을 고용할 정도로 고속 성장하고 있다. 이 회사가 개발한 온라인게임도 가입자가 1년간 90만 명이나 늘었다. 왕 씨는 “정부가 벤처기업들엔 세금을 깎아주고 사무실을 값싸게 빌릴 수 있게 해줘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목표는 내년 말까지 최대 2000만 명의 유저를 확보하는 것. 현재 6000만 명 정도인 중국의 인터넷 이용자가 앞으로 4억∼5억 명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돼 불가능한 목표가 아니라는 설명이다. 왕 씨는 “경제위기가 닥치면 저렴한 레저활동을 선호하는 만큼 온라인게임 회사엔 경제위기가 오히려 호재”라며 “정부의 지원이 계속되고 있어 중국의 정보기술(IT) 분야는 성장잠재력이 크다”고 말했다.
브라질과 인도 정부도 자동차, 가전, 항공기 등 제조업 지원에 적극 나서고 있다.
브라질 첨단제조업체의 상징인 엠브라에르 사는 현재 3개의 신형 항공기 모델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모두 항공기의 미래로 꼽히는 중소형 제트기다. 매출액 규모에서 세계 4위인 엠브라에르는 중소형 제트기 시장에서는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다. 이 회사의 클라우디우 갈두 카멜리에 부사장은 “경제위기에도 연구개발비는 연간 5억 달러 이상을 유지하고 있다”며 “브라질의 첨단기술 산업을 이끈다는 자부심으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 신흥국 간 경제교류 확대
브라질 회사원 에디네이 헤발라투 씨(30)는 새로운 사업 제의를 받고 고심 중이다. 최근 은행에 다니는 친구들로부터 중국 제품 수입사업을 하자는 제의가 들어온 것. 그는 멕시코에서 금속제품을 수입하는 회사에 다니다 몇 년 전 중국의 다국적기업으로 이직했다. 경제위기 후 미국과 거래하던 회사들이 감원을 하거나 문을 닫을 때도 중국을 거래처로 둔 회사들은 끄떡없었다. 헤발라투 씨는 “미국이나 남미 대신 중국과 거래하는 사업이 각광받고 있다”며 “자원이 많은 브라질과 인건비가 싼 중국은 앞으로도 계속 좋은 파트너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잠재적인 경쟁상대인 서로를 바라보는 시각이 호의적인 것만은 아니다. 특히 인도에는 아시아의 또 다른 대국 중국을 견제하는 심리가 폭넓게 퍼져 있다. 총선에서 경제성장에서 중국을 앞서겠다는 공약을 내세우는 후보자들이 나올 정도다. 1960년대 무력충돌로 번졌던 영토분쟁 등이 잠재돼 있는 탓이다.
전기용품 제조회사에 다니는 쿠나르 키쇼르 씨(26)도 중국에 대해 강한 경쟁심을 드러냈다. 그는 “다른 나라는 몰라도 중국은 꼭 이겨야 한다”며 “당장은 어렵더라도 인도에 인재가 더 많은 만큼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1등 국민을 향한 도전
이들 나라의 국민들은 자국의 미래에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인도 경제인단체에 근무하는 시암 선더 씨(33)는 “인도가 늦어도 2030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는 “인도의 경제성장률은 매년 7%를 넘는 데다 잠재력이 무한하다”며 “인도가 세계 경제를 불황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80년대 경제위기 이후 지속된 저성장으로 패배의식이 만연했던 브라질도 달라지고 있다. 금융개혁 등을 이끈 현 정부의 높은 지지율이 브라질의 미래에 대한 기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 한 외국계 은행에서 지점장으로 일하고 있는 발디네이 알베르투 씨(39)는 브라질의 외교역량이 커지는 것에 높은 점수를 줬다. 그는 “경제가 발전하면서 브라질을 찾는 외국 지도자들이 많아지는 등 위상이 높아지고 있다”며 “아시아에서 중국이 리더가 되고 있듯 브라질은 미국에 대항해 남미의 리더가 돼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하지만 정치권의 부패나 빈부격차 같은 문제를 꼽으며 비관론을 펴는 이도 적지 않았다. 중국의 온라인게임 회사에 근무하는 쑤창(蘇暢·24·여) 씨는 “하위직 공무원은 열심히 일하는 중국 국민들이 먹여 살린다는 말이 나올 만큼 부패한 것 같다”며 “공무원이 바뀌지 않으면 중국은 선진국이 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상파울루 퇴직자노조 간부인 젠티우 페르난데스 호사 씨(59)는 “브라질이 강대국이 되려면 빈부격차부터 줄여야 한다”고 꼬집었다.
특별취재팀
▼ 신흥국들 “한국을 경제발전 모델로” ▼
브라질 “높은 교육열 배워야”
신흥국들에선 한국의 경제발전 모델과 최근의 빠른 경제회복 비결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높은 교육열과 과감한 투자를 통해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경제 무게중심을 옮기고 있는 한국을 배워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실제 브라질의 주요 언론에선 한국을 심층적으로 다룬 보도가 자주 등장한다. 올 5월 브라질 유력 일간지 ‘포우하 지 상파울루’가 한강 개발과 청계천 복원 등을 통해 서울이 대표적인 친환경 도시로 떠오르고 있다고 전하는 등 지난해부터 한국을 소재로 한 보도가 부쩍 늘었다.
한국의 성장 비법으로 교육열을 꼽으며 이를 배워야 한다는 평가도 많았다. 브라질의 수도 브라질리아에서 발행되는 일간지 코헤이우 브라질렌세는 경제위기가 시작된 작년 9월 칼럼에서 한국의 교육제도를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의 성장은 교육에 대한 엄청난 투자와 지속적인 고용창출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상파울루국립대 4학년생 브루누 자네타 씨(23)는 “선진국이 되려면 한국처럼 교육을 통해 좋은 인재를 배출해야 한다”며 “최근 브라질에선 한국을 배워야 한다는 구호가 많아졌다”고 말했다.
같은 아시아권인 인도와 중국은 한국의 높은 기술력에 관심이 많았다. 중국 상하이의 외국계 회계법인에서 일하는 왕량(王亮·31) 씨는 “중국 기업들은 아직 단순한 대량생산에 중심이 맞춰져 있다”며 “질적인 면에서 중국은 한국에 비해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 아난드 샤르마 인도 상공장관은 “현대자동차 삼성전자 LG전자의 제품은 인도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브랜드”라며 “한국 경제는 인도 경제성장의 모델”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中 - 印 “기술력 따라잡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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