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살아있다/일중전쟁下]“美 빼놓고 亞 말할수 없다”

  • 입력 2008년 1월 7일 13시 47분


역사는 살아있다 동아시아 150년 시리즈

지식인 20명에 듣는다--동아시아 근현대사의 10 대 사건은? (12)

권오기(権五琦) 전 동아일보 사장

아시아의 근대란 한마디로 말하면 서양과의 교제다.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미국과 중국은 큰 존재다. 거기에 일본의 성공과 실패가 관련된 구도다.

일한이나 일중 관계를 한 쪽 당사자의 눈으로만 일대일로 보는 것보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나란히 보면, 서로를 더 잘 알 수가 있다. 한국의 입장에서 일본을 보면 악마로 보이고, 일본에서 한국을 보면, 개화가 늦어서 야만스럽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는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다. 일국사를 넘어 서서 역사를 늘어놓고 한번 보자. 그리고 이웃에게의 배려도 필요하다. 일본의 용감한 역사를 말할 때에, 그 용감함으로 인해 희생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했으면 좋겠다.

동아시아의 근현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2차 대전 후, 승리한 미국이 압도적인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군사, 경제, 정치적으로 큰 존재가 되어, 미국을 빼 놓고는 아시아는 말할 수 없다. 일본의 민주화는 미국의 힘에 의한 것이지만, 일본은 미국에 제품을 수출해 경제 대국이 되었다. 미국이 아시아가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 21 세기가 아닐까.

미국의 강점은 무엇인가. 여러가지 설이 있겠지만, 나는 직업상, 언론의 자유를 제일로 꼽는다. 정부의 의견과 다른 저널리스트가 얼마든지 있다. 미국은, 우선 국가가 있고 “거기에 따르라”는 발상은 아니다. 에드가 스노(Edgar Snow)와 마오쩌둥(毛澤東)을 세계에 알렸다. 아시아의 저널리스트는 그런 일을 할 수 없었다.

이웃나라에 사는 사람으로서 일본의 존재는 크다.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것이 이득이다”라는 말을 듣고, 조선은 식민지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제국주의국의 지배보다 가혹했다. 일본 자신이 궁핍했기 때문에, 조선을 혹독하게 수탈했다.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 지배에 대해 사죄를 한 예는 별로 없다. 1995년의 무라야마(村山) 수상의 담화는, “일본이 국책을 잘못 행했다”라고 사죄를 해, 평가된다. 그러나 모처럼의 담화를, 일본의 정치가가 몇 번이나 부정하는 발언을 하기 때문에, 아시아인들은 “일본은 정말로 사죄하지 않았다”라고 의혹을 갖게 된다.

전후, 일본은 가치관을 크게 바꾸어 군국주의 국가로부터 문화 국가가 되었다. 1949년에는 유카와 히데키(湯川秀樹) 박사가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고, 1951년에는 구로사와 아키라(黒澤明) 감독의 “라쇼몽(羅生門)”이 베네치아 국제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해, 일본의 문화가 세계 레벨에서 인정받았다. 당시, 한국은 한국 전쟁으로 문화를 말할 경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부러웠다. 일본은 전쟁을 하지 않고, 평화 국가로서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그것을 평가하고 싶다.

1950년 한국 전쟁에 나는 포병으로 참전했다. 17세였다. 애국심이라는 것보다 어차피 군대에 갈 거라면, 생각이 맞는 친구와 함께 군대에 가려고 지원해서, 평양으로 갔다.

북한은 민족 해방 전쟁이라고 말하지만 , 폐가 되는 이야기다. 지금도 휴전 협정 밖에 없는 불안정한 상태로,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 민족이 합의해서 조선을 남북으로 분단한 것은 아니다. 전쟁에는 미국과 중국이 참전하여, 대국의 이해가 얽혔다. 통일을 하자고 해도, 우리 민족만의 합의로는 부족하다.

중국은 근대화를 진행시키는데 ‘양무’ ‘변법’이라며, 여러 변혁을 해 봤지만, 가까스로 도착한 것은 공산 ‘혁명’이었다. 지금은 개혁, 개방이다. 사회주의는 평등을 존중하고, 자본주의는 자유를 존중한다. 이 두가지는 근대의 가치이다. 이것을 중국식으로 하고 있는 것이 개혁, 개방이다. 과연 중국은 정치를 민주화 할 수 있을까. 큰 숙제이고, 주시해야 한다.

(사쿠라이 이즈미(桜井泉))

【리스트】

① 제2차 대전 후, 미국의 압도적인 존재(이하, 무순서)

○ 아편 전쟁

○ 메이지 유신으로부터 청일 전쟁

○ 러일 전쟁

○ 한반도의 식민지화

○ 전후 일본(군사로부터 문화에)

○ 한국 전쟁

○ 한국의 경제발전과 민주화

○ 미중 관계 정상화

○ 중국의 개혁, 개방

【약력】

권오기. 1932 년생. 1963년, 한국 동아일보의 특파원으로서 일본에 와, 한일 국교 교섭을 취재했다. 김영삼 정부에서는 부수상겸 통일원 원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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