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10월혁명 90년]<상>잊혀진 역사의 현장을 가다

  • 입력 2007년 10월 25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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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창살에 갇힌 혁명’사회주의 혁명의 발상지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정치사박물관에 보존된 이오시프 스탈린의 초상화. 초상화를 보호하는 쇠창살의 중앙이 뜯겨 나가 독재자에 대한 현지인들의 반감을 드러내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정위용  특파원
‘쇠창살에 갇힌 혁명’
사회주의 혁명의 발상지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정치사박물관에 보존된 이오시프 스탈린의 초상화. 초상화를 보호하는 쇠창살의 중앙이 뜯겨 나가 독재자에 대한 현지인들의 반감을 드러내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정위용 특파원
세계 첫 사회주의 혁명… “이젠 기억하고 싶지 않다”

《제정(帝政)러시아 달력으로 10월 25일(현재의 양력으로 11월 7일)은 러시아 볼셰비키가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을 세운 이른바 ‘10월 혁명’ 기념일이다. 사회주의 혁명 90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러시아공산당은 11월 7일을 국경일로 정하자고 최근 주장했지만 러시아 하원인 두마는 이 안건을 아예 상정조차 하지 않았다. 혁명의 발상지인 상트페테르부르크(당시 페트로그라드) 시민 대부분도 “그 시대를 기억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20세기 초 세계를 뒤흔든 10월 혁명은 사회주의 종주국에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사가 됐다. 그렇지만 이 혁명에서 파생된 사회 경제적 독소는 아직도 러시아 사회를 짓누르고 있다.》

의회 ‘국경일 지정’ 안건 상정조차 안해

“크렘린광장 레닌묘 옮겨라” 여론 비등

스탈린 초상화 훼손 우려 쇠창살 신세

시민들 “혁명이 남긴건 빵 아닌 빈곤뿐”

▽잊혀진 혁명=23일 기자가 찾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정치사박물관에 보존된 블라디미르 레닌의 집무실. 그의 집무실 건물은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정부(情婦) 발렌티나 크셰신스카야가 쓰던 저택으로 볼셰비키가 1917년 초에 빼앗아 10월 혁명을 준비하던 곳이다. 관람객들은 과거 공산당 간부들의 성지였던 집무실과 베란다 옆을 무심코 지나갔다.

단체 관람을 왔다는 러시아 대학생들은 “사회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황제 애인의 집을 뺏은 이유를 모르겠다”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이들은 레닌이 쓰던 사무집기엔 눈길도 주지 않았다.

한 대학생은 “교내에는 레닌을 박물관에서만 만나고 싶다는 의견이 널리 퍼져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도 모스크바 크렘린 광장에 안치돼 있는 레닌의 묘소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여론에 대해 “레닌을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국민 여망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레닌의 뒤를 이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초상화는 박물관 쇠창살에 가려져 있었다. 창살 일부는 이미 뜯겨 나갔다. 혁명 세력의 일원이자 대학살 주역에 대한 저주와 증오가 끝나지 않은 흔적이었다.

60세가 넘은 박물관 안내인은 “스탈린에게 탄압을 받았던 시민들이 이따금 몰려와 초상화를 찢으려고 해 이런 일이 벌어졌다”며 “사회주의 원죄는 쉽게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귀띔했다.

1917년 10월 25일(구력) 오후 9시 40분 페트로그라드 네바 강변에서 혁명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순양함 오로라호. 이 배 주변은 요즘 자본주의 관광 명소로 변해 있다.

가이드로 보이는 러시아인은 기념품 좌판 앞에서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에게 “소매치기에 주의하라”고 소리쳤다. 지갑을 양복 상의 안주머니에 챙기던 한 관광객은 “혁명 기념일을 쓰라린 추억으로 기억하지 않고 이런 식으로 지내는 것도 즐거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해 2월 니콜라이 2세가 폐위된 뒤 임시정부 내각이 사용하던 겨울궁전도 역사적 사건을 냉대하고 있었다. 이 궁전은 혁명군이 1917년 10월 26일 오전 2시 10분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임시정부 총리를 체포하기 위해 포위 작전을 벌인 곳.

혁명군이 침입한 궁전 안 황실 식당은 혁명 기념일을 앞두고 수리에 들어갔다. 식당과 이어진 ‘어두운 통로’에서 만난 겨울궁전 안내인들은 “2시 10분에 멈춘 식당 시계도 이제는 걸려 있지 않고 찾아오는 사람도 별로 없다”고 말했다.

▽혁명의 유산과 독소=러시아 시민들은 세계 최초로 성공한 사회주의 혁명을 외면하는 이유로 혁명 구호에 담긴 독소와 혁명 세력이 후대에 남긴 후유증을 꼽았다.

혁명 세력은 ‘빵, 토지, 평화’를 앞세우며 노동자 농민을 혁명 주력군으로 이용했다. 그러나 혁명 구호는 혁명 동조 세력을 끌어 모으는 ‘주술’에 불과했고 결국 어느 것도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이 시민들의 생각이다.

볼셰비키들이 사용했던 혁명정부 청사(현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청) 앞에서 만난 사람들은 “10월 혁명이 내세운 빵과 토지의 평등은 ‘만인의 빈곤’을 초래했다. 사회주의 말년의 소련은 지하자원을 팔아 식량을 구하느라 국력을 다 쓰는 바람에 껍데기가 됐다”고 비판했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는 구호가 적혀 있던 청사 입구를 지나가던 니나 프롤로바(52·여) 씨는 “공산당 일당독재가 낳은 공포와 폭력 정치는 민주주의의 진전을 결정적으로 가로막았다”고 말했다.

자본주의 도입 이후 명맥을 유지하는 러시아공산당은 최근 “사유제도를 청산한 10월 혁명이 산업화, 집단농장, 문화혁명을 꽃피웠다”고 선전했다. 이런 공산당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이제 소수에 불과하다. 올해 러시아공산당에 대한 지지율은 10% 미만으로 떨어졌다.


▲ Stenka Razin - Andre Rieu

▼혁명으로 90년간 주인 잃은 땅 아직도 러시아 경제 발목 잡아▼

소련붕괴 후 토지사유화 도입됐지만

대부분 소유권 분쟁 휘말려 큰 혼란

“내가 땀 흘려 일구는 땅이 내 땅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볼셰비키 공산주의자들은 10월 혁명 당시 인구의 절대 다수였던 러시아 농민의 이 같은 여망을 혁명에 이용했다. 하지만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 지 9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볼셰비키의 토지 정책은 러시아 사회의 성장을 갉아먹는 크나큰 장애 요인이 되고 있다.

러시아 농민들은 10월 혁명의 전야인 1917년 9월까지도 지주의 토지를 빼앗아 자기들 방식대로 나눠 갖는 데 몰두했다.

토지 국유화를 구호로 내세운 볼셰비키 공산당은 같은 해 10월 혁명에 성공한 뒤 농민의 무단 토지 점유를 인정했다. ‘혁명의 우군’을 끌어 모으기 위한 술책이었다.

볼셰비키식의 토지 개혁은 ‘토지는 모두 국가 소유이지만 농민들이 토지를 사용할 권리를 보장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이런 토지 정책은 1927년 스탈린이 대토지 소유계층인 ‘쿨라크’ 박멸을 선언하면서 집단소유 및 국유화로 방향을 틀었다. 스탈린은 1937년 여름 토지 국유화에 반대하는 농민들을 반혁명 분자로 몰아 피의 숙청을 진행했다. 일부 학자는 당시 희생된 농민이 3000만 명이 넘어 인류 역사상 최대 참화였을 것으로 추산한다.

사회주의 정권에 땅을 빼앗긴 농민들은 1950년대 중반 이후 집 주위 부속 토지를 일궈 채소 감자 등을 심었다. 브레즈네프는 1965∼66년 경제개혁을 추진하면서 농가 부속지에 대한 사적 소유를 승인했다. 1977년의 경우 이 같은 부속지가 총경작지의 2%에 불과했지만 소련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의 무려 27%를 산출했다.

소련이 붕괴되고 4년 후인 1995년 토지 사유화 정책이 시작됐지만 12년이 지난 지금도 토지 문제는 여전히 러시아 사회와 경제의 불안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국가 소유지 위에 지은 사유 주택, 주민 분쟁으로 인해 경계가 불분명한 토지, 소유권을 이전하지 않은 농토 등은 지금도 러시아 법률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러시아 주민들은 재산권 행사를 위해 토지 분쟁에 휘말리며 국가는 주민들의 동요를 막는 데 행정력을 소모한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지난해부터 부속지에 대한 ‘사면(赦免)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토지 점유자가 서류를 갖춰 등기소에 제출하면 소유자로 인정한다는 정책이다.

그렇지만 이 정책이 나온 뒤에도 토지를 측량하지 않았거나 상속으로 받은 부속지의 경우엔 분쟁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러시아 전문가들은 “90년이 지나도 주인을 만나지 못한 토지야말로 10월 혁명이 남긴 대표적 독소”라고 설명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정위용 특파원 viyon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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