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민주주의 훼손’ 뒤엔 소장 법률전문가 있었다

  • 입력 2007년 9월 15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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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일방적인 해석으로 대통령 권한 확장 시도

영장없는 감청-테러용의자 고문 ‘법치주의 역행’

영장 없는 감청과 테러용의자에 대한 가혹한 심문, 재판 없는 장기구금….

법치주의와 민주주의 대표국가 미국에서 행해진 이런 일들의 본질은 헌법이 보장한 한계선을 넘어서까지 대통령과 행정부의 권한을 확장하려는 시도였다. 민주주의 가치의 본질을 훼손하면서까지 그 같은 일을 주도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미국 법무부 법률자문실장(차관보급)을 지낸 잭 골드스미스 하버드대 법대 교수가 지난주 펴낸 ‘테러시대의 대통령’을 비롯해 최근 2년간 발간된 각종 자서전, 언론이 보도한 비화(秘話) 등을 토대로 ‘미국의 일탈’을 주도한 인물들의 행보를 분석해 봤다.

▽권력 핵심의 소장파 확신가들=2004년 3월 당시 앨버토 곤잘러스 백악관 법률고문(현 법무장관, 17일 퇴임 예정)은 워싱턴의 한 병원을 찾았다. 전날 담낭 제거 수술을 받은 존 애슈크로프트 법무장관에게 영장 없는 감청의 법적 효력을 연장해 달라고 요구하러 온 것이었다.

애슈크로프트 장관은 “난 마취 때문에 권한을 일시적으로 부장관에게 넘겼다”며 승인을 미뤘다. 하지만 옆에 있던 장관 부인이 혀를 끌끌 찰 정도로 손님들은 집요했다.

당시 병원에 동행했던 사람 가운데는 데이비드 애딩턴(49) 부통령실 법률자문관(현 비서실장)이 포함돼 있었다. 바로 그가 헌법 체계에 대한 일방적 해석을 주도하며 ‘대(對)테러 정책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 불려온 권부 내 30, 40대 법률전문가 그룹의 좌장 격이다.

애딩턴 비서실장은 지난 25년간 딕 체니 부통령의 지근거리를 지킨 참모다. 그는 작은 수첩크기로 인쇄된 미 헌법을 늘 지니고 다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비판론자들은 “애딩턴의 눈엔 대통령의 권한을 명시한 헌법 2조만 보인다”고 조롱한다.

그와 2인 3각을 이룬 사람이 한국계인 존 유(40·버클리 캘리포니아대 법대 교수) 당시 법무부 법률자문관실 부차관보였다. 하버드대, 예일대 법대를 마치고 연방대법원 서기라는 엘리트 과정을 거친 그는 한때 ‘보수적이지만 지적인 소장 헌법학자’로 꼽혔다.

그는 헌법이 명시한 ‘의회가 전쟁을 선포할 권한을 갖는다’는 조항에 대해 “전쟁 개시결심 및 진행은 대통령의 고유권한이며, 의회는 선포(declare)라는 형식적 권한만을 갖는다”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법의 지배를 깬 3대 정책=이들 소장파 이데올로그들의 관심은 대통령의 권한 강화다. 베트남전쟁과 워터게이트 사건을 거치며 대통령의 권한이 지나치게 축소돼 테러와의 전쟁에서 미국을 위험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9·11테러 이후 체포한 알 카에다 조직원에게서 “제2의 9·11이 임박했다”는 진술을 받아든 뒤 공황에 빠졌다.

그 과정에서 나온 것이 이른바 ‘고문 메모’였다. 유 부차관보는 “사망이나 장기(臟器) 손상이 없으면 고문이 아니다”라는 해석을 내놓았다. 테러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기 위해선 강압적 심문도 허용된다는 논리를 제공한 것이다.

이들 소장파 법률가들은 “9·11을 일으킨 알 카에다와 그 배후를 제공한 탈레반과 같은 테러집단은 소속된 국가가 없으므로 전쟁포로의 인도적 처우를 규정한 제네바 협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는 논리도 만들어냈다.

이들의 또 하나 관심사는 ‘외국의 테러집단이 미국 체류자에게 국제전화를 건다면? 그때 뭔가 임박한 테러의 징후가 포착된다면?’이었다. 그 대책으로 영장 없는 감청이란 방식이 나왔다.

통화의 한 당사자가 알 카에다 관련자이고 미국과 제3국의 국제전화라는 단서만 붙으면 무차별 감청이 시작됐다. 역시 의회가 제정한 법률이 아닌 대통령의 행정명령이 법률적 근거가 됐다.

헌법의 한계를 넘나드는 그런 정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이들은 존 코미 법무부 부장관, 잭 골드스미스 법률자문실장 등 온건파 법률가들과 끊임없이 충돌했다. 그러나 결국은 온건파를 보고 채널에서 소외시키는 방법으로 의견을 관철했다.

테러와의 전쟁 7년차를 맞은 미국은 이제 일그러진 법질서의 회복 과정으로 들어서는 추세다. 지난해 연방대법원은 “관타나모에 수감된 테러용의자를 정식 법원이 아닌 군사위원회에서 재판하는 것은 대통령 권한 밖”이라고 판시했다. 영장 없는 감청도 올 1월 포기됐다.

워싱턴=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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