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살아있다/러일전쟁上]각국의 교과서를 비교하다

  • 입력 2007년 9월 13일 15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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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 전쟁으로 점령한 뤼순항(旅順港)을 바라보는 일본군인들. 일본 교과서에 실려 있는 착색 사진
러일 전쟁으로 점령한 뤼순항(旅順港)을 바라보는 일본군인들. 일본 교과서에 실려 있는 착색 사진
《메이지 일본이 운명을 건 러시아와의 전쟁. 그리고 한반도의 역사를 크게 바꾼 식민지 지배. 이 두 가지 사실을 동아시아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중학생용 역사 교과서를 살펴본다.》

■일본-강해지는 우월감 / 10년 전부터 기술

도쿄(東京)서적의 『새로운 사회 역사』에서는 청일 전쟁에 이은 항목으로, 러일 전쟁을 양면 2페이지에 걸쳐 다루고 있다.

개전까지의 경위에 관해서는, 열강 각국의 국제 관계에 대한 설명에 중점을 두고 있다. 본문에서는 러시아가 의화단 사건 후에도 군대를 만주에 주둔 시킨 것에 대해, 일본은 영국과 동맹을 맺어 대항했음을 기술하고 있다. 여기에 미국과 영국이 일본을, 프랑스가 러시아를 원조하고 있던 상황을 보여주는 관계 그림도 싣고 있다.

전후 상황에 대해서는, 일본이 얻은 권익이 적다며 불만을 가진 국민이 정부를 공격하여 폭동까지 일어난 사실과, 계속되는 군비 확장으로 국민의 부담이 줄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또한, 다음과 같은 기술이 이어진다.

《일본의 승리는, 인도와 중국 등 아시아 여러 나라에게 자극을 주어, 일본을 모방한 근대화와 민족 독립의 움직임이 높아졌습니다. 한편, 국민들 사이에서 일본이 열강의 일원이 되었다는 대국 의식이 생겨나, 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한 우월감이 강해져 갔습니다.》

이 기술의 후반 부분은 1997년에 발행된 교과서부터 포함되었다. “전쟁의 영향력에 대해서, 가능한 한 다방면에서 설명하기 위해 유의했다”며, 도쿄서적의 와타나베 노리오(渡辺能理夫) 사회 편집부장은 말한다.

일본에 의한 조선의 식민지화에 대해서는 약 1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러일 전쟁 후의 식민지화에 대해서 저항 운동이 일어난 것을 지적한 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910년, 한국은 일본에 병합되었습니다. 일본은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고, 무력을 배경으로 식민지 지배를 강력하게 추진했습니다. 학교에서는 조선사 수업을 금지하고, 일본사와 일본어를 가르치며,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는 교육을 실시했습니다.》

또한, 조선의 왕궁 안에 조선 총독부가 세워진 사진과 일본어로 수업을 받는 아이들의 사진을 게재해, 당시의 모습을 알기 쉽게 전하고 있다.

(요시자와 다쓰히코 吉沢龍彦)

■중국-나라 안이 전쟁터였음에도 다루지 않고

인민 교육 출판사의 『중국 역사』에서는 러일 전쟁과 조선의 식민지화에 대한 기술은 전혀 없다. 한편, 러일 전쟁의 원인이 된 의화단과의 싸움에 대해서는 ‘8개국 연합군에 의한 중국 침략 전쟁’이라는 타이틀로, 4페이지에 걸쳐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 첫머리는 다음과 같다.

《1900년 봄, 의화단 운동은 징진(京津) 지역에까지 퍼져 갔다. 투쟁 방향은 직접, 제국주의 침략 세력으로 향하였다. (중략) 8개국 연합군은 베이징 곳곳에 방화와 살해, 약탈을 감행하는 등, 그 악행이 끝이 없었다.》

일본에서는 ‘의화단의 난’ 또는 ‘의화단 사건’으로 불리고 있지만, 중국에서는 ‘반제 애국 운동’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학계 일부에서 이러한 위치 설정에 대한 반론이 나오고 있지만, 교과서의 기술을 재검토하려는 기색은 없다.

그렇다 치더라도, 뤼순(旅順), 랴오양(遼陽), 봉천(현재의 심양) 등, 중국의 중요한 장소가 전쟁터였음에도 자국사의 교과서에서 언급하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중국의 교과서를 잘 아는 게이오 대학의 또완뤼총(段瑞聡) 준 교수는 “교전의 주체는 일본과 러시아다. 중국 측의 인식으로서는, 두 제국에 의한 전쟁으로 보기 때문에, 자국사로 인식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러일 전쟁과 조선의 식민지화는 고등학교의 세계사 교과서(인민 교육 출판사의 『세계 근대 현대사』)에 등장한다. “제국주의로 향하는 주요 자본주의국“이라는 테마로, 러일 전쟁의 원인 등은 언급하지 않고, 조선의 식민지화에 중점을 두었다.

《1905년, 일본은 러일 전쟁의 승리로 순풍을 타며 미국의 지지를 얻은 후, 조선을 식민지로 손에 넣었다. 1910년, 일본은 조선 정부에 “한일 합병 조약”(1897년, 조선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변경했다)의 체결을 강요해, 조선을 정식으로 병탄했다.》

(사토 가즈오 佐藤和雄)

■한국- 지배와 수탈 51 페이지에 걸쳐

한국에서는 러일 전쟁이라 부른다. 전쟁과 함께, 일본에 의한 조선의 식민지화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자국사의 국정 교과서에서는 먼저 러일 전쟁에 대해 전쟁에 이르는 경위를 포함하여 5줄 정도로 설명하고 있다.

이어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을사조약(제 2차 한일 협약) ▽군대가 해산된 후의 ‘의병 전쟁’의 확대 ▽식민지 지배 하에서의 교육, 언론 활동 ▽물자와 인적자원의 수탈 등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1919년에 일어난 “3•1 운동”에 이르기까지 51페이지에 달한다. 을사조약에 관한 부분은 이렇게 쓰여 있다.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고,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을사조약을 강요하였다.》

1910년의 합방 조약에 대해서는, ‘국권 침탈’이라는 항목 안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일제는 군대와 경찰을 전국 각지에 배치하여 우리 민족의 저항을 미리 차단하고, 이완용을 중심으로 한 매국 내각과 이른바 합방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오랫동안, 독자적인 문화를 창조하면서 발전해 온 우리 민족은 나라를 빼앗기고 일제의 노예 상태로 떨어지게 되었다.》

한국인의 ‘항일 민족 운동’에도 중점이 놓여 있다. 예를 들어, 안중근이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사건에 대해서는 “민족 독립의 의사를 분명히 보였다.”고 높이 평가한다.

한일 간에 영유권 분쟁이 일고 있는 독도(일본명, 다케시마) 문제도, 이러한 ‘일제 침략’의 하나로 간주해, “일본은 러일 전쟁 중에 일방적으로 독도를 그들의 영토로 편입시켜 버렸”다라고 쓰고 있다. 국사 편찬 위원회의 구선희(具仙姫) 사료 조사실장은 “일본에 의한 침략의 서막이므로 제대로 가르치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사쿠라이 이즈미 桜井泉)

■대만-입헌 운동에 미친 영향에 중점

러일 전쟁과 조선의 식민지화에 대해서, 대만의 교과서는 극히 간단한 기술이지만, 중국사와 세계사에서 다루고 있다. 『국민 중학•사회』(남일서국(南一書局))의 중국사 부분에서는, 청조 말기의 입헌 운동 항목에서 5줄 정도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러일 양국은 중국 동북부의 권익을 둘러싸고 중국 영내에서 개전하였다. 이듬해 러시아의 패전으로 일본의 세력이 동북부로 들어갔다. 일부의 지식분자는 일본과 같은 조그만 나라가 대국을 누르고 의외로 승리를 거둔 것은, 일본의 입헌 군주체제로부터 기인한 것이라 보고 입헌 요구를 해왔다.》

1983년 “역사 과정 표준”에 의거한 교과서에서도, ‘러시아군의 동북부 강탈과 러일 전쟁’의 항목에서, 러일 전쟁 전후의 양국과 청나라의 중국 동북부를 둘러싼 마찰을 설명했다. 계속 해서 “러일 전쟁이 끝나자, 지식인들은 입헌이 전제를 이겼다며, 조야에서 끊임없이 입헌을 요구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신•구 교과서 모두 입헌 운동에 미친 영향을 중요하게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러일 전쟁 후 조선이 식민지가 되었던 것에 대해 중국사 부분에서는 언급이 없고, 세계사 부분의 ‘아시아의 민족 부흥 운동’ 항목에서, 항일운동에 중점을 두며 단4줄만을 할애하고 있다.

《조선에서는 1910년 일본에 병합된 후, 끊임없이 항일운동이 제창되었다. 1919년에는 서울에서 대규모 항일운동이 일어났지만, 일본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항일운동은 계속 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 후에 한국은 일본의 통치로부터 벗어났다.》

이 교과서의 편집 지도 위원 초호웨민(周恵民) 정치 대학 역사학부 교수는 “조선 병합에 대해서는 거의 기술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1902년의 영일 동맹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일 동맹이 없었다면 러일 전쟁은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업시간 관계로 많이 쓸 수 없다”고 말한다.

(다무라 히로쓰구 田村宏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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