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괴롭힌 판사, 이미 용서했어요”

  • 입력 2007년 6월 26일 19시 55분


양복바지를 세탁소가 잃어버렸다며 6500만 달러(약 600억원)를 물어내라는 희대의 '바지 소송'을 승리로 일단락 지은 정진남(60) 송수연(56) 씨 부부는 25일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2년 넘도록 소송에 시달렸고, 변호사 비용으로 이미 지불한 돈만 8만 달러(약 7200만원)에 이를 정도로 두 부부는 액운(厄運)에 휘말렸다. 그러나 용서의 의미도 되새기게 됐고, 힘내라는 글을 보내온 얼굴 모를 미국인의 격려에 외롭지 않게 버틸 수 있었던 시기였다.

정 씨 부부는 이날 아침 법원의 승소판결을 변호사에게 전화로 통보받았다. 곧이어 몰려드는 한국과 미국 기자들을 상대했고, 섭씨 30도를 넘는 날씨에 냉방장치 없는 가게에서 주문받고, 배달 일을 나서는 일상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어쨌건 오랜 소송이 끝나 후련하다"는 소감을 밝혔다.

공식 회견 직후인 이날 오후 정 씨 부부를 세탁소에서 만나 바지소송의 전말, 로이 피어슨(58) 변호사에 대한 감정, 15년 이민생활의 팍팍함을 들어봤다.

정 씨 부부는 "피어슨 씨를 이미 용서했다"고 말했다. 2005년 행정심판소 판사로 임명됐던 그는 무리한 소송 탓에 재임용 탈락 위기에 몰려 있다고 보도된 바 있다.

6500만 달러라는 소송가액이 한국 언론에 보도되면서 첫 재판이 끝난 5월, 두 부부는 서울에 계신 89세 노모의 전화를 받았다.

"시어머니는 불자(佛者)에요. 기도 열심히 하고, 끝에는 꼭 그 사람을 용서한다는 말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악연(惡緣)을 만들지 말라면서요."

그로부터 이틀 후 정 씨 부부는 피어슨 씨를 용서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법정에 나타난 피어슨 씨는 이혼한 탓에 가족도 곁에 없었고, 나이든 어머니만 어두운 표정으로 자리를 지켰다. 송수연 씨는 "그를 보면 솔직히 측은하다는 생각도 들었다"고 했다.

피어슨 씨는 평소에 10달러 50센트 세탁비를 신용카드로 긁다가 '한도 초과'가 나오는 바람에 돈을 못 낸 적도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차도 없고, 집도 월세다. 그가 제기한 6500만 달러 청구액 가운데는 '향후 10년간 다른 세탁소를 주 1회 방문해야 하니 그 때 타야한다'며 렌터카 비용까지 포함돼 있었다. 송 씨는 "피어슨 씨가 법대를 졸업했다지만 변호사 활동을 거의 안 했다고 들었다"고 했다.

영어도 잘 안 통하는 미국 워싱턴에서 세탁소를 경영해 온 정 씨 부부는 피어슨 씨와 갈등이 시작되면서 힘겨운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나 정작 무리한 거액소송에 휘말린 내용이 알려지면서 이웃과 다른 미국인의 존재감을 크게 느꼈다고 했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1시간 30분 동안 가게로 들어서는 고객들은 축하한다며 손을 맞잡아 주었다. 명소(名所)가 되어버린 탓에 지나가다가 들러서 "내가 다 행복하네요(I am happy for you)"라고 말하는 이웃도 있었다.

워싱턴 시내 교사인 레이몬드 폴스 씨는 "이 사람들 좋은 사람들이다. 참 잘됐다"면서 기자에게 명함까지 건넸다.

미국 곳곳에서 응원 편지가 날아들었다. 주소를 적지 않은 한 시민은 "이민생활이 어렵지 않았느냐. 불행한 그 사람 때문에 상처받지 마라"며 볼펜으로 '스마일 그림'을 그려넣었고, "당신을 위해 기도한다. 힘을 잃지 마라"는 편지도 날아왔다. "걱정 말아라. 기껏해야 1달러 물어주면 꼭 맞다"며 1달러 지폐를 편지 안에 넣어 보내온 이도 있었다. 7월 하순이면 새로 고용한 현재의 변호사에게 줄 수임료 마련을 위한 모금행사도 개최된다. 모두가 정 씨부부에게 삶을 지탱할 힘이 되어준 선한 이웃들이었다.

어찌 보면 2005년의 상황은 피어슨 씨로서도 언짢을 수 있다. 판사로 발령받은 첫 출근일에 맞춰 입으려던 양복바지가 정 씨 부부 세탁소에서 없어졌으니까. 그러나 그의 대응은 '한 몫 보겠다'는 심산이라고밖에 이해하기 힘들었다.

정 씨 부부는 한동안의 다툼 끝에 5000달러를 물어주기로 했다. 오랜 법정공방으로 변호사비용을 들이느니 변호사의 1차례 법정출두 비용인 5000달러는 치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후 피어슨 씨에게서 최후 통첩성 편지가 날아들었다. 5만1000달러가 청구됐다. "어떻게 이렇게 큰 돈을 쓰느냐"고 하소연 해 봤지만, 그는 "가게와 집을 담보로 해서 은행에 대출받으면 되지 않느냐"는 황당한 말까지 했다.

정 씨가 피어슨 씨에게 1만2000달러를 주겠다며 타협을 시도했다고 워싱턴포스트가 보도하면서 '정 씨 부부가 실제로 뭔가 큰 잘못을 하긴 했구나' 하는 의구심을 갖는 이들이 생겼었다. 그러나 그 액수는 오보로 판명됐다.

처음에 한인변호사에게 도움을 받다가 송 씨 사촌여동생의 법대동기인 지금의 매닝 변호사를 소개받았다. 제대로 된 변호가 필요했다.

소송이 시작되면서 한인들이 많은 세탁업협회는 잔뜩 긴장했다. 이런 식으로 분실물에 피해배상액이 높아지면, 사업에 지장이 큰 탓이다. 정 씨는 "그래서 다들 걱정해 주셨고, 다행이 1달러도 물어주지 않아도 된다는 판결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이전에도 이런 논란이 전혀 없었던 바는 아니다. 하루에도 수백 벌의 옷이 맡겨지는데 간혹 분실이나 약품처리 잘못이 생길 수 있다.

수년전에도 노란색 티셔츠가 탈색되는 문제가 생겼지만, 옷 입은 기간을 고려해 보상액을 10달러로 합의했다. 송 씨는 "이런 게 상식 아니냐"고 했다.

정 씨 부부는 92년 아내 송 씨가 버지니아 주의 봉제공장 종업원으로 취업 이민하는 형식으로 미국에 건너왔다. 정 씨는 세탁소 종업원으로 일했다. 94년부터 조그만 세탁소를 시작해 현재의 세탁소는 2000년 시작했다. '세탁소가 셋인 부자'라는 이야기는 세탁물 수거용 사무실을 두 곳 둔 것이 잘못 전달된 것이라고 했다.

서울 시내의 4성급 호텔의 종업원으로 오래 일했던 정 씨는 "입시지옥을 피하겠다"는 생각에 중고교생 두 아들을 데리고 팍팍한 이민생활을 시작했다. 정 씨는 "주6일을 아침 5시40분에 집을 나서고, 1시간10분 동안 운전해 세탁소에 도착해 보일러를 켜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된다"고 했다. 집에 도착하면 밤 10시.

이들 부부는 지난달 ABC 방송에 출연해 "너무 지쳤다. 이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했다. 한국 인터넷에 실린 댓글도 이들을 가슴 아프게 했다. 정 씨는 웃으면서 "한국 연예인들이 악플 때문에 자살한다는 말에 이제는 내가 공감한다"고 말했다.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한국을 떠났던 이들이 희망을 놓아버리고 싶던 시점이었다.

소송이 잘 마무리 된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졌다고 했다. 송 씨는 "방송을 본 뒤에 돌아가지 말아라. 우리가 같이 기도해 준다는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역시 얼굴 모를 이웃의 격려가 고단한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었다는 말이었다.

▼소송결과=미 워싱턴 DC 상급법원의 주디스 바트노프 판사는 "정진남씨는 소비자 보호법을 위반하지 않았다. 바지를 잃어버렸다는 원고인 피어슨 씨는 '1달러'도 보상받을 수 없으며, 변호사인 자신이 스스로 진행한 소송비용도 보상받지 못한다. 원고는 정 씨 부부가 (개인 변호사 비용이 아닌) 법정 출두 등에 쓴 비용(약 1000달러)도 떠안아야 한다"고 판시했다.

정씨가 지금까지 지출한 변호사 비용 8만 달러 및 두 번째 변호사인 크리스토퍼 매닝 변호사 수임료도 원고인 피어슨 씨가 부담할지 여부 등은 앞으로 계속될 심리에서 결정되게 된다.

워싱턴=김승련특파원 srkim@donga.com

워싱턴=이기홍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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