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주석의 방미를 바라보는 리틀사이공

  • 입력 2007년 6월 20일 17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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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어딘데 공산당 우두머리가 오겠다는 거야."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렌지카운티의 베트남 이민자 타운인 '리틀 사이공'의 한 식당. 쌀국수를 먹으며 신문을 읽던 구벤 둑 남 씨가 얼굴을 찌푸렸다.

방미중인 응웬 밍 찌엣 베트남 국가주석이 23일경 리틀사이공을 방문할 가능성이 있다는 보도에 그는 "말도 안돼, 그 자들은 다 범죄자야"라며 화를 냈다.

종전 32년만에 미국을 방문(18~23일)한 찌엣 주석의 실용주의 외교 행보가 주목받고 있지만 이를 지켜보는 베트남계 이민자들의 시선은 여전히 차갑고 적대적이라고 AFP통신, 로스앤젤레스타임스 등 외신들이 전했다.

로스앤젤레스 시 남쪽 오렌지카운티 내 웨스트민스터 시와 가든그로브 시에 걸쳐 있는 리틀사이공은 공식 등록된 베트남계 주민만도 13만5000명으로 두 시 인구의 각각 30%와 21%를 차지하는 지역.

이곳엔 이미 찌엣 주석 방문에 대비한 대책 위원회가 2개나 만들어졌다. 환영을 위한 기구가 아니라 반대 시위를 위한 기구다. 웨스트민스터 시의원 앤디 쿼흐 씨는 "(찌엣 주석 방문은) 오사마 빈 라덴이 뉴욕에 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베트남이 공산화되면서 가족을 잃고 보트피플이 되어 조국을 떠난 이들은 지금도 공산당에 적개심이 여전하다. 곳곳에 1975년 패망한 남부 베트남의 국기가 걸려 있다. 전통적으로 민주당 텃밭인 캘리포니아주지만 여기서는 공화당이 강세다.

2002년 베트남 경제사절단이 왔다가 호텔에서 쫓겨났고, 2005년 공산당 간부 일행은 "조용히 움직여야 한다"는 충고에 따라 경찰 모터사이클의 안내를 포기했다. 웨스트민스터와 가든그로브 시는 2004년 '공산주의자 없는 지역'(Communist-free Zone) 결의안을 채택했다.

"공산당 간부들은 대개 북쪽 출신인데 억양과 태도가 달라 금방 눈에 띈다"는 주민들의 말엔 여전히 뿌리깊은 적개심이 묻어난다.

그러나 그런 기류는 젊은 세대로 내려오면 차츰 약해진다. 존 트란(23)씨는 "부모님은 항상 공산당 얘기를 하시지만 우리 또래는 별 관심이 없다. 안정된 직장과 개인생활이 우리의 관심"이라고 말했다.

한편 미국 내 베트남 교민들의 모국 투자는 송금액을 합쳐 지난해 100억 달러에 달했다. 모국 방문은 1993년 1만 5000명에서 지난해에는 50만 명으로 늘었다.

19일 뉴욕증권거래소를 방문해 자본주의의 현장을 살펴본 찌엣 주석은 해외동포들에게 9월부터 입국 비자를 면제해주겠다고 발표했다. 그는 22일 워싱턴에서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23일 캘리포니아를 방문할 예정이지만 리틀사이공에 들릴지 여부는 양국 정부 모두 확인해주지 않고 있다.

워싱턴=이기홍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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