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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7년 2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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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원 외교위 아시아태평양·환경소위원회가 ‘군위안부 피해자의 인권보호’를 주제로 주최한 청문회가 시작된 지 몇 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팔레오마바에가 위원장의 인사말에 이어 마이크를 잡은 로라바허 의원은 “1994년 이후 여러 일본 총리가 이 문제에 대해 사과했다”며 군위안부 결의안 121호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그러나 “사과는 물론 ‘아시아여성기금’(일본이 민간자금을 모아 만든 기금)을 통해 보상도 했으므로 이젠 미래를 이야기하자”는, 일본 정부가 늘 이용해 온 논리는 곧 완전히 깨어지기 시작했다.
때로는 더듬대고 주어 동사가 연결되지 않는 서툰 말솜씨였지만, 누구도 감내하기 힘든 고통을 안고 살아온 군위안부 피해자 세 할머니들이 털어놓는 진실 앞에서 청문회장을 가득 메운 청중과 의회 관계자들은 때론 깊은 탄식을 내쉬고 때론 전율하며 몸을 움츠렸다.
네덜란드인으로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 살다 19세 때 일본군에 강제수용소로 끌려간 얀 뤼프 오헤르너(84) 할머니(본보 9일자 A2면 인터뷰 기사 참조)가 ‘위안소’에서 겪었던 참상을 낱낱이 증언하자 결의안 제출을 주도한 일본계 마이크 혼다 의원의 입에서도 나직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팔짱을 끼고 있던 로라바허 의원도 점점 심각한 표정으로 두 팔로 턱을 괸 채 귀를 기울였다.
오헤르너 할머니는 “전쟁은 끝났지만 우리 위안부들에게는 끝나지 않았다. 일본군은 내 청춘을 무참히 짓밟고 모든 것을 빼앗아 갔다”며 “일본은 전쟁 당시의 잔학 행위를 시인하고 역사를 똑바로 가르쳐라”고 일갈했다.
김군자(80) 할머니는 “내 인생을 영원히 바꿔 놓았다”며 16세 때 끌려가 겪은 위안부 생활을 증언했다. “끌려간 첫날 저항하다 맞아 왼쪽 고막이 터졌고 그 뒤 3년간 죽지 않을 만큼 매를 맞아 지금도 너무나 많은 흉터가 남아 있습니다. 하루 평균 20명, 많을 때는 40명의 성노리개가 되어야 했고 수차례 자살을 시도했지만 죽지 못하고 살아남았습니다.”
“20만 명이 넘는 피해자 가운데 일본 기금을 받은 사람은 왜 283명에 불과하냐”는 의원들의 질문에 오헤르너 할머니는 “나는 일본인들이 나에게 한 행동을 용서했지만 영원히 잊을 수는 없다. 우리에게 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며 “우리가 바라는 것은 돈 몇 푼이 아니라 일본이 그들의 잔악한 전쟁 범죄를 인정하고 후세대들에게 정확한 역사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군자 할머니는 “우리는 돈을 원하는 게 아니다. 인권 유린과 전쟁 범죄에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는 점을 그들이 인식하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용수 할머니도 “일본 정부는 사과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우리는 사과받은 적이 없다”며 “일본에 있는 돈 전부를 준다고 해도 거부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3시간 반가량 진행된 청문회가 끝난 뒤 에니 팔레오마바에가 위원장은 “지난해 레인 에번스 의원이 제출한 결의안이 상임위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됐듯이 군위안부 결의안 통과가 무난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이라크 문제 때문에 아직은 논의하기가 어려운 상태”라고 말했다. 혼다 의원도 “표결 일정이 현재로선 확실치 않다”며 “5월로 예정된 일본 총리의 방미 이후에 처리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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