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7년 1월 15일 02시 54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지난해 7월 17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선진 8개국(G8) 정상회의 오찬장.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마이크가 켜진 줄 모르고 무심코 이런 대화를 나눴다. 세계 언론에 흘러나간 정상들의 어휘는 10대 소년들이 껌을 씹으며 나누는 잡담 수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서구사회에서 지도자들이 이처럼 자신들의 ‘밑천’을 드러내 주는 일은 결코 흔치 않다. 대중 앞에 설 때 그들은 철저히 준비된 어휘와 표정을 연출한다. 이라크 정책 때문에 요즘 거의 매일 TV에 등장하는 부시 대통령도 간결하고 정제된 어휘들만을 조심스럽게 사용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진실과는 먼 모습이 아닐까. 대통령학의 권위자인 미국 조지타운대의 스티븐 웨인 교수를 지난 주말 만나 지도자의 언행 즉, ‘대통령의 입(口)과 몸짓’을 주제로 의견을 들었다. 그는 ‘지도자가 소리를 치면 관심은 끌 수 있지만 이런 일은 국가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부시 대통령의 연설을 보노라면, 백악관의 이면을 다룬 책에 등장하는 ‘멍청이(asshole)’ 같은 비속어를 입에 올리는 ‘부시 씨’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다. 그처럼 준비해서 말하는 것보다 꾸밈없이 자신을 드러내는 게 진솔한 것 아닐까.
“꾸밈없이 말할 수 있다는 건 큰 미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대통령의 경우엔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대통령 자신이 진실이고 정직하다고 생각하는 말이 개인적으론 OK지만 국가 차원에선 OK가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공식 석상에서 입을 열 때 그것은 행정부와 국가를 대신해 말하는 것이지 개인의 의견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후보자 시절엔 솔직한 어휘를 구사하는 게 좋지만 일단 취임한 뒤 대통령은 개인이 아니라 국가의 상징이다. 발언은 반드시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정제된 상태로 나와야 한다.”
―미국 대통령들의 연설은 어떤 과정을 거치는가.
“즉흥적으로 나오는 발언은 거의 없다. 예를 들어 북한 핵문제라고 하면 국무부 또는 국가안보회의(NSC)의 담당자가 초안을 만들어 사본을 국방부 정보국 같은 관련 부서에 회람시킨다. 협의 과정에서 표현에 이견(異見)이 제기되면 조정한다. 끝내 조정이 안 되면 대통령이 최종 결정을 한다. 이어 대통령 연설문 작성 담당자가 최종안을 만들어서 관계 부서에 다시 보내 검토하게 한다. 보좌관들은 물론 일부 의원들에게도 보여 줘 반응을 들어본다. 기자들과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신념을 드러내기 전에 미리 한 번 걸러 보려는 것이다. 물론 개인적 진실도 가치가 있지만 공식적 언어는 국익의 견지에서 신중히 고려되어야 한다.”
웨인 교수는 “특히 외교적 군사적 이슈의 발언에선 의도적으로 진의를 흐리기도 한다”며 “이는 상대방이 이쪽의 속내를 가늠하기 어렵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부시 대통령이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여러 예상되는 반응을 심사숙고하는 과정을 소홀히 한 채 감정적이고 직설적인 결정을 내린 대표적 사례가 이라크 침공”이라며 “두고두고 그의 평판에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지적했다.
“공식석상에서 입을 열 때 대통령은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는 ‘국민의 대통령’인 동시에 ‘국민을 이끌어 가는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대통령이 민초들의 생각과 감정을 이해하기를 바란다. 정치인들은 그걸 실감나게 보여 주기 위해 시중의 언어를 동원한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들은 대통령의 말이 더 사려 깊고 논리정연하며 더 핵심을 찌르는 것이기를 기대한다. 비록 자기 자신이 평범한 사람이라고 해도 대통령이 된 이상은 자신의 발언에 품위와 사려 깊음, 그리고 자신의 직위에 대한 존중심을 담아야 한다. 대통령으로서의 자신과 개인으로서의 자신, 그리고 후보 시절의 자신, 이 셋 사이엔 분명한 경계가 있어야 한다.”
―논쟁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국민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을까.
“대중의 관심이 필요한 지도자가 소리를 치기 마련이다. 그러면 전선(戰線)의 복판에 있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가에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첫째, 정부와 공직에 대한 신뢰가 점차 허물어진다. 국민은 지도자가 왜 그러는지 이해는 할지언정 핵심 지지자를 빼고는 존경하지 않을 것이다.”
―부시 대통령이 레임덕 시기에 들어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레임덕 시기에 들어간 대통령에게 요구되는 자세는 어떤 것인가.
“부시 대통령은 새 이라크 정책을 강하게 밀고 나가지만 의회와 여론은 이를 지지하지 않는다. 레임덕 시기의 대통령이 의회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사안에 이니셔티브를 쥐려고 하는 건 결코 현명하지 못하다. 더 세게 밀고 나갈수록 인기가 떨어지고 힘을 더 잃는다. 국가는 빨리 움직여야 할 때가 있고 휴식이 필요한 때도 있다. 재임기간에 강력했던 대통령일수록 임기 말에는 새롭고 거대한 정책의 이니셔티브를 쥐려고 하기보다 국민과 함께 미결사항을 매듭지으려 노력한다.”
■비판에 대한 대응은
“자신만 옳다는 지도자는 비판 못참아
정부 감시자로서의 언론역할 인정해야”
―수다쟁이 지도자와 과묵한 지도자 가운데는 어떤 쪽이 나을까.
“과묵한 건 좋은 게 아니다. 대변인이나 다른 참모에게 대신 말하라고 시킬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 나서야 할 경우도 많다. 대통령은 교육자다. 국민을 교육하고 설득해야 하는 공식 역할이 있다.
하지만 말을 너무 자주 하는 것도 분명히 단점이다. 우선 스스로를 가볍게 여기게 만들며 곤경에 빠뜨릴 부주의한 언사가 튀어나올 수도 있다. 대통령의 연설은 특별한 이벤트여야 한다. 너무 자주 얘기하면 사람들은 점점 무감각해지고 대통령의 발언으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관심과 대우를 받지 못한다.”
―당신이 51%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당선됐다고 치자. 51%가 원하는 것을 이룩하는 데 주력하는 것과 나머지 49%의 뜻을 존중하고 감싸 안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
“세 가지 점을 고려해야 한다. 우선 강제투표제가 아닌 이상 51%나 49%란 숫자는 모든 국민의 뜻이 아니라 단지 투표한 사람의 의사다. 미국에서 전체 유권자 3분의 1 이상의 지지를 받아 당선된 대통령은 거의 없다. 둘째, 정치시스템을 고려해야 한다. 여당이 행정부와 의회를 모두 지배할 때는 좀 더 당파적인 접근을 해도 이치에 닿는다. 하지만 지금처럼 의회를 야당인 민주당이 지배할 때는 대통령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 성공하고 싶다면 초당파적 접근법을 취해야 한다. 셋째, 당선된 상황이 어땠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요즘 미국 언론들은 부시 대통령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것 같다. 부시 대통령은 어떻게 반응하나.
“물론 미국 언론도 많은 문제가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서 언론은 정부의 감시자로서, 그리고 국민에게 (대통령이 설명하는 것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제공함으로써 균형을 잡게 해 주는 역할을 한다. 자기의 진실만이 유일한 진실이라고 믿는 지도자들은 언론의 비판을 참지 못한다.”
웨인 교수는 “모든 정치인은 자신이 정당하게 받아야 할 비판보다 더 많은 비판을 억울하게 받는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라고 강조했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조지타운대 행정학 교수. 미국 대통령 및 정부 연구 전공. 로체스터대를 거쳐 컬럼비아대에서 석사와 박사(1968년). 미 의회에서 대통령 선출 과정 및 제도에 대한 청문회가 열리면 자주 증언을 해 왔다. ‘대통령제 조사그룹’ 및 ‘수도권 정치과학협회’의 회장을 지냈다. ‘백악관으로 가는 길’ ‘입법적 대통령제, 대통령의 리더십’ 등 대통령제를 분석한 10권의 역저(공저 포함)를 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