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암살배후 알 만하다” 시리아 비난

  • 입력 2006년 11월 23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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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맞은편에서 차량이 돌진해 왔다. 1대인지 2대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차량에서 뛰쳐나온 괴한 3명이 은색 세단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소음총인 듯 소리도 없었다. 은색 세단은 종잇장처럼 구겨졌고, 유리창엔 무수한 총탄 자국이….’

총알은 피에르 게마옐(34) 레바논 산업자원부 장관의 머리와 가슴에 박혔다. 병원에 옮겨졌을 때는 이미 숨진 상태. 21일의 암살 작전은 순식간에 끝났다.

‘떠오르는 스타 정치인’ 게마옐 장관의 피살은 그렇지 않아도 불안한 레바논의 정세에 불을 질렀다. 시민들의 격렬한 항의시위 속에 암살 배후세력을 놓고 국제사회의 비난과 의혹제기가 잇따르고 있다. 22일 전 세계 주요 언론은 일제히 이 사건을 톱뉴스로 보도했다.

▽시리아가 배후?=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자유를 방해하는 사악한 자들의 소행”이라며 암살 배후세력을 강력히 비난했다. 영국과 프랑스 외교장관은 “레바논의 불안을 노린 행위”라고 규탄했다.

존 볼턴 유엔 주재 미국대사는 “지금까지 레바논에서 자행된 일련의 암살 유형을 보면 누가 이번 사건을 저질렀는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라며 시리아를 배후로 지목했다.

최근 2년 사이 암살당한 레바논의 주요 정치인 5명은 모두 반(反)시리아 인사다. 시리아는 특히 지난해 2월 차량폭탄 테러로 숨진 라피크 하리리 전 총리의 암살을 뒤에서 조종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번 사건이 하리리 암살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유엔의 특별재판소 설립 승인(22일)을 코앞에 둔 시점에 발생했다는 점도 의혹을 증폭시켰다. 게마옐 장관은 재판소 설립을 적극 지지해 온 인물이다.

시리아의 지원을 받고 있는 헤즈볼라는 최근 레바논의 내각 지분 확대를 요구하며 현 푸아드 알시니오라 총리 정부와 대립해 왔다. 지난달 11일 헤즈볼라 소속의 장관 및 시아파 의원 6명이 사임한 상태.

법적으로 내각 구성원 24명 중 3분의 1 이상이 물러나면 내각은 자동 해산된다. 사망한 게마옐 장관의 뒤로 한 명만 더 사라지면 헤즈볼라는 새 선거를 통해 요직을 장악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시리아는 “비열한 범죄”라고 암살을 강력 비난하며 개입설을 강력히 부인했다.

▽“서방의 중동정책 실패 사례”=이날 외신들은 “암살 사건이 레바논뿐 아니라 미국과 이란, 시리아, 이스라엘의 영향력 구도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으며 사태 추이를 주시했다.

타임 온라인은 “시리아를 껴안으려는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외교정책이 곤경에 처했다”고 보도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레바논을 중동 민주주의의 새로운 모델로 내세우려던 미국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고 분석했다.

보복전이 이어지면서 레바논 내 종파 간 갈등 확산은 물론 헤즈볼라가 쿠데타를 일으킬 가능성까지 거론되고 있다. 더구나 7월 터진 레바논-이스라엘 교전의 후유증이 아직 가라앉지도 않은 상태다.

게마옐 장관의 아버지인 아민 게마옐 전 대통령은 “아들의 죽음에 과잉대응하지 말아 달라”고 국민에게 당부했다.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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