獨파견 광원-간호사…라인강에 쏟은눈물 ‘한강의 기적’으로

  • 입력 2006년 10월 5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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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옛 서독의 탄광 근로자들이 갱도에서 빠져나오고 있다. 한국인 광원도 보인다. 부모형제를 생각하며 막장에서 눈물과 석탄가루 묻은 빵을 먹었다고 한다(위 사진). 1970년대 옛 서독에 파견된 한국인 간호사가 환자의 산책을 돕고 있다. 초창기 시체 닦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이들은 ‘코레아니쉐 엥겔(한국 천사)’로 불렸다(가운데).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이 옛 서독에서 파독 광원들 앞에서 연설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광원들의 손을 일일이 잡으며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아래 사진).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70년대 옛 서독의 탄광 근로자들이 갱도에서 빠져나오고 있다. 한국인 광원도 보인다. 부모형제를 생각하며 막장에서 눈물과 석탄가루 묻은 빵을 먹었다고 한다(위 사진). 1970년대 옛 서독에 파견된 한국인 간호사가 환자의 산책을 돕고 있다. 초창기 시체 닦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이들은 ‘코레아니쉐 엥겔(한국 천사)’로 불렸다(가운데).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이 옛 서독에서 파독 광원들 앞에서 연설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광원들의 손을 일일이 잡으며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아래 사진). 동아일보 자료 사진
한국 간호사가 독일에 파견된 지 올해로 40년이 됐다. 5월 21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파독 간호 40주년 기념행사’에서 한복을 입은 파독 간호사 출신 교포 여성들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한국 간호사가 독일에 파견된 지 올해로 40년이 됐다. 5월 21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파독 간호 40주년 기념행사’에서 한복을 입은 파독 간호사 출신 교포 여성들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이제는 다 늙었어. 추석과 설날 같은 명절이 다가오면 고국이 더욱 그리워져.” 29년 전 광원으로 독일에 간 성규환(67) 재독한인광산근로자협회장은 강산이 몇 번 변할 정도로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고국에 대한 그리움에 젖어 산다고 말했다. “독일 광원을 뽑는 모집공고를 보고 갔더니 700명을 뽑는데 4000명이 넘게 왔더라고. 잘못하면 떨어지겠다 싶어 정신이 바짝 들더라니까. 광원 선발시험이 무엇이었는지 알아? 60kg짜리 모래가마니를 5번 들어올리는 것이었어.” 그는 큰 주먹을 내보이면서 “그때는 깊이 1000m, 온도 40도가 넘는 막장에서 석탄가루가 묻은 빵을 먹으면서도 거뜬할 정도로 제법 힘이 셌지”라며 껄껄 웃었다.》

○ 1970년대 경제성장의 ‘종자돈’ 마련

1963년 12월 23일. 1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 500명의 파독(派獨) 광원 1진이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들 중에는 대학 졸업자와 중퇴자도 적지 않았다.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79달러로 필리핀(170달러)과 태국(260달러)에도 크게 못 미쳤다.

‘보릿고개’(준비했던 곡식이 떨어지고 보리가 여물기 전인 4, 5월 식량 사정이 매우 어려웠던 시기)를 밥 먹듯이 경험하고 자란 이들 대부분은 오로지 가족을 위해 김포공항에서 울부짖는 부모형제를 뒤로하고 이역만리로 떠났다.

이렇게 1977년까지 독일로 건너간 광원은 모두 7932명. 이들은 독일의 탄광에서 비 오듯 하는 땀과 눈물을 참아가며 연금과 생활비를 제외한 월급의 70∼90%를 고스란히 조국에 있는 가족에게 송금했다. 이들이 한국으로 송금한 돈은 연간 5000만 달러로 한때 한국 GNP의 2%에 이르렀다.

하지만 1964년부터 1979년 사이 파독 광원 가운데 65명이 사망했다. 지하 갱에서 근무 중 사망한 사람이 27명으로 가장 많았다. 지하의 좁은 공간에서 일하다 생긴 질병 때문에 죽은 사람도 12명이나 된다. 4명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성 회장은 “파독 광원 가운데 현재 독일에 거주하는 사람은 1430명이다. 나머지는 한국으로 돌아갔거나 미국 캐나다 등 제3국으로 갔다”며 “마지막 한국인 광원이었던 정용기 씨도 2004년 11월 은퇴해 이제 파독 한인 광원의 역사는 마무리됐다”고 말했다.

파독 간호사들의 눈물겨운 역사도 마찬가지다.

1966년 10월 15일 동독 속의 섬이었던 서베를린 템펠호프공항에 한국의 간호요원 1126명이 처음으로 도착했다. 정부 차원의 간호사 공식 파독이 끝난 1976년까지 독일로 건너간 간호사는 모두 1만226명.

양희순(60) 재독한인간호협회 회장은 “초창기 파독 간호사들의 일은 딱딱하게 굳어버린 시체를 닦는 일이었는데 워낙 일을 잘해 호평을 받았다”며 “서독 언론들은 이들을 ‘코레아니쉐 엥겔(한국 천사)’이라고 불렀다”고 말했다.

파독 광원과 간호사의 수입은 1970년대 한국 경제성장의 ‘종자돈’ 역할을 했다. 광원과 간호사들의 파독 계약조건은 ‘3년간 한국으로 돌아올 수 없고 적금과 함께 한 달 봉급의 일정액은 반드시 송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서독 정부는 이들이 제공할 3년치 노동력과 그에 따라 확보하게 될 노임을 담보로 1억5000만 마르크의 상업차관을 한국 정부에 제공했다. 이 때문에 재독 한인교포 1세대들은 “우리는 조국 근대화의 기수”라는 남다른 자부심을 갖고 산다.

○ 가깝고도 멀게 느껴지는 조국

현재 재독 교포는 총 3만여 명. 파독 광원과 간호사, 그리고 이들의 자녀가 중심인 교포들은 독일 사회에서 나름대로 정착해 잘 살아가고 있다. 2세들의 경우 학계 법조계 의학계 등에 속속 진출해 한인사회의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2세들에게도 고민은 있다. 5월 독일 남부지역에서 한국인 어머니와 독일인 아버지 사이에서 성장한 한 교포 2세 대학생이 부모를 살해하고 자살한 끔찍한 사고가 있었다. 화학을 전공했던 이 청년은 남긴 유서에서 ‘동양인의 피가 섞인 데 대한 콤플렉스와 차별을 견디지 못해 세상을 떠난다’고 밝혀 교민사회에 충격을 줬다.

또 1970년 광원으로 독일을 찾은 교포 1세 E 씨는 9월 14일 함부르크에서 숨진 지 1주일 만에 독일인 이웃에 의해 발견돼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두 사건은 재독 교포 2, 3세가 하는 ‘나는 독일인인가, 한국인인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의 깊이와 이제는 현장에서 은퇴한 1세대들의 ‘우울한 노년’을 보여 주는 상징적 사례다.

주독 한국대사관 이용현 영사는 “교포 1세들은 광원이나 간호사에서 은퇴한 뒤 연금을 받고 사는 경우가 많은데 경제적으로는 대부분 넉넉하지 않은 편이다”고 말했다.

그는 “1세들은 한국에 가서 노년을 마치기를 원하지만 정작 한국을 방문했다 돌아오면 ‘한국에 가서 살기 어렵겠다’고 한다. 수십 년간 독일에서 살아온 데다 경제적 기반이 없고 한국에 친지도 없는 사람은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처지다”라고 했다.

양희순 회장은 “파독 광원과 간호사 정년 퇴직자들 가운데 부인이나 남편 없이 홀로 사는 노인들의 말년을 위한 휴양관을 지으려 한다”고 말했다. 간호협회는 독일 북부 브레멘 인근의 바닷가에 있는 작은 땅을 기증받았다. 건물 설계는 독일인이 도와주기로 했다고 한다.

양 회장은 “건물을 짓기 위해 우리끼리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으려고 하는데 대부분 월급이나 연금으로 근근이 사는 분이 많아 쉽지가 않다”며 “정부가 조금만 도와주면 고맙겠다”고 말했다.

프랑크푸르트=이종훈 기자 taylor55@donga.com

▼“조국도 우릴 잊지 말아 줬으면…”▼

5년 전 혈혈단신으로 독일로 건너간 이환도(63·사진) 베를린한인협회장은 광원 생활을 하면서 간호사로 왔던 부인을 만나 가정을 꾸렸다. 슬하에 세 자녀를 두고 있다. 이 회장은 지난달 30일(현지 시간) “우리 세대에서 큰 고생은 거의 끝났고 교포 2세들은 학계 법조계 등에 진출하며 한인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면서 “한국의 발전을 보면 정말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언제 독일에 왔나.

“한국의 한 구청에서 일하다 3년 계약으로 1971년 독일에 왔다. 좀 더 머물며 돈을 벌어 보려고 하다가 이렇게 눌러앉게 됐다. 세월이 참 빠르다.”

―초창기 광원 생활은 어땠나.

“루르 지방의 캄프린트포르트 탄광에서 일을 했다. 생전 구경도 못했던 탄광에 들어가서 일하는 게 얼마나 힘들었던지….”

―독일 생활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언어와 의사소통이었다. 억울한 차별도 많이 경험했다. 오로지 자식들 잘 교육시켜 보자는 일념으로 버텼다. 아내는 아직도 이곳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다.”

―고국에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나.

“일년에 한 번 정도 한국을 방문한다. 이제는 생활환경 등 맞지 않는 게 너무 많아 돌아가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아직도 영주권을 갖고 산다.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한국이 그동안 많이 변했는데….

“한일 월드컵 전후로 한국의 발전상이 독일에 많이 알려져 어디를 가도 떳떳하다. 우리가 고생한 보람이 있었던 것 같다.”

―교민사회가 한국 정부에 바라는 게 있나.

“이제 (사회생활에서) 은퇴한 1세대들이 모여 바둑 두고 담소라도 나눌 한인회관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일본 정부는 뒤셀도르프에 일본인타운을 만들어 줬지만 그렇게까지 바라진 않는다. 조국이 우리를 잊지 않았으면 한다.”

베를린=이종훈 기자 taylor5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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