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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6년 9월 22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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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민당을 깨부수겠다’ ‘일본을 바꾸겠다’는 기치를 내걸고 등장해 ‘헨진(괴짜)’ ‘한마디 거사’ 등의 애칭으로 불려 온 개성 강한 정치인. 패전 후 세 번째로 장수한 일본 총리가 된 그는 재임 중 미일관계를 굳건하게 만들었고 과감한 구조개혁으로 ‘잃어버린 10년’을 보낸 일본 경제의 부활에도 큰 공을 세웠다는 평가를 받았다. 반면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로 아시아 외교가 경색되는 ‘부(負)의 유산’을 남겼다.
화려한 연출과 연기를 밑천으로 극장형 정치를 펼쳐 온 고이즈미 총리. 이런 ‘고이즈미 극장’의 폐막을 앞두고 기억에 남는 장면을 통해 그가 남긴 것을 점검한다.
#1. 신사 참배
8월 15일 오전 7시 40분. 연미복 차림의 고이즈미 총리가 야스쿠니신사에 나타났다. 총리로 취임한 이래 여섯 번째 참배다. 참배를 거듭할수록 한국 중국 등의 비판이 커져 지난해 10월에 참배한 후로는 양국과의 정상회담이 중단됐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참배는 ‘마음의 문제’라며 올해 ‘종전기념일’ 참배를 강행했다. 포퓰리즘과 완고함의 조합. 그의 참배 이유를 대개 이렇게 설명하지만 야스쿠니신사 참배 덕분에 집권 기간 우익의 공격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어찌됐건 야스쿠니신사 참배로 인한 ‘아시아 외교 실패’는 고이즈미 총리의 5년 평가에서 큰 오점으로 남았다.
#2. 깜짝 방북
2002년 북한을 방문해 북-일 평양선언을 발표했다.
뜻하지 않게 북한이 저지른 납치 피해 문제가 불거져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는 당대에 북-일 국교 정상화를 이뤄서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어 했다는 게 많은 이의 지적. 2004년 두 번째로 방북했지만 성과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가 꿈을 완전히 접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7월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한 후 아베 당시 관방장관이 전면에 나서 대처하는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북한을 직접 비난하지 않았다.
#3. 엘비스 생가
6월 30일 미국 테네시 주 멤피스에 있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생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전용기 ‘에어포스 원’을 타고 이곳을 찾은 그는 감격에 겨워 엘비스 흉내를 내며 노래를 불렀다. 그는 엘비스의 열렬한 팬이다.
그가 집권한 이래 미일관계는 ‘더 좋을 수 없을 정도’로 밀착도를 높여 갔다. 특히 군사 부문에서 미일동맹은 일체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의 표현을 빌리면 ‘사무라이와 카우보이의 기묘한 우정’이 그 바탕이 됐다.
그는 미국이 세계적으로 고립되는 가운데 부시 대통령을 우직하게 지지했고, 부시 대통령은 ‘고이즈미에게 누가 되는 일은 하지 말라’는 주문으로 화답했다. 지금도 부시 행정부는 야스쿠니신사 문제에 관한 언급을 철저히 삼가고 있다.
#4. 구조 개혁
바그너의 오페라를 좋아하는 그는 국정도 드라마처럼 끌고 갔다. 정적들에게 ‘저항세력’ 낙인을 찍고 재임기간이 1년 남은 2005년 결사적인 전투를 치렀다. 우정민영화를 부결시킨 국회를 해산하고 총선거를 선언한 것.
저항세력을 당에서 추방하고 그들이 무소속으로 출마한 지역구에는 ‘닌자(자객, 대항후보)’를 보냈다. 9월 11일 총선 결과는 고이즈미 총리의 압승. 1개월 뒤 우정민영화 법안은 가결됐다.
#5. TV 활용
전임자들이 무대 뒤에서 움직인 것과 달리 그는 TV 카메라 앞에 거의 매일 나타나 기자들의 질문에 답했다. 알기 쉽고 ‘촌철살인’인 그의 발언은 예외 없이 방송으로 보도돼 국민에게 전달됐다. 오랫동안 그의 비서관을 지내 온 이지마 이사오(飯島勳) 씨는 “국민과 총리 사이의 거리가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미디어를 활용해 권력을 집중시키고 여론을 움직이는 그의 수완은 미래 지도자들의 부러움을 샀다.
이 밖에도 고이즈미 총리가 연출한 무수히 많은 장면이 있었다. 그러나 모든 유산을 후임자에게 남긴 채 고이즈미 극장의 막이 서서히 내려오고 있다.
도쿄=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천광암 특파원 iam@donga.com
“나는 마음 약한 보통 사람… 언제나 뭔가의 도움을 받아 운이 좋다고 생각하며 노력해 왔습니다.” 고이즈미 총리는 21일 이렇게 재임기간을 회고했다. 그러나 퇴임 후 무엇을 할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는 이달 초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가 열린 핀란드 헬싱키에서 기자들에게 “이제 선두에 서는 일은 없다”며 “뒷전에서 폐 끼치지 않고 지원해 갈 것”이라고 밝혔다. 다른 자리에서도 퇴임 후 조용히 국회의원 생활만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그의 성격상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무성하다.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은 ‘섭정(攝政)’설. 잠시 쉬다가 아베 신조 정권이 시험대에 오를 내년 참의원 선거 때 ‘구원투수’로서 컴백할 것이라는 분석도 나돈다. 나아가 ‘포스트 아베’로 다시 나설 것이라는 말이 떠도는가 하면 ‘뭔가 역사에 남을 일’을 벌이려 할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도쿄=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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