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위크엔드]도쿄/‘순수한 사랑’에 빠진 일본

  • 입력 2004년 4월 15일 16시 44분


일본에서는 최근 한국 드라마 ‘겨울연가’를 소개하는 잡지들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일본에서는 최근 한국 드라마 ‘겨울연가’를 소개하는 잡지들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무대는 일본의 어느 지방도시.

남자 고교생 ‘사쿠’는 여고생 ‘아키’와 첫사랑에 빠진다. 즐거웠던 시간도 잠시, 아키는 백혈병에 걸려 죽는다.

연인을 떠나보내고 상심한 사쿠. 실연에 낙담하고 때로는 방황도 하지만, 첫사랑의 아련한 추억을 가슴에 묻고 이내 마음을 추스른다….

순정만화에나 어울릴 것 같은, ‘그렇고 그런’ 줄거리. 하지만 일본의 젊은 독자들은 사쿠와 아키의 슬픈 사랑이야기에 눈물을 찍어낸다. 이들 남녀 고교생의 애절한 러브스토리는 베스트셀러 소설 ‘세계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에 담겨 있다.

40대 초반의 무명작가가 2001년 4월 선보인 이 작품은 작년 봄부터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의 여성 독자를 중심으로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해 지금까지 171만부가 팔려나갔다.

일본에서 순수문학 작품이 100만부 이상 판매된 것은 1987년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가 쓴 ‘노르웨이의 숲’ 이후 18년 만에 처음. 일본 출판계는 인터넷과 휴대전화에 정신이 팔린 젊은 층이 어찌 보면 밋밋하기까지 한 이 소설에 열광한 이유가 무엇인지 원인을 찾아내느라 분주하다.

출판사의 편집 담당자는 “사랑과 죽음을 정면에서 진지하게 다룬 순수 연애소설이라는 점이 세파에 찌들지 않은 깨끗한 사랑을 그리워하는 독자들에게 어필한 것 같다”고 말했다.

도쿄 신주쿠의 대형서점 ‘기노쿠니야(紀伊國屋)’는 순애소설 붐에 주목해 문학작품 코너의 앞줄에 러브스토리를 다룬 소설을 집중 배치했다.

휴대전화에서 연재를 시작해 여고생들에게 인기를 끈 연애소설 ‘Deep Love’는 판매부수가 150만부에 육박했다. ‘어느 사랑의 시’ ‘선생님의 가방’ 등 눈물샘을 자극하는 다른 연애소설들도 호평을 받고 있다.

시청률에 민감한 민영 TV들이 이런 흐름을 놓칠 리 없다. 연애를 잘하는 비결을 소개하거나 사랑에 얽힌 이야기를 다루는 오락 프로그램을 밤 11시대에 경쟁적으로 내보내고 있다. 시청자들의 순애 취향 정서를 반영한 듯 프로의 콘셉트에서도 미묘한 변화가 감지된다.

종전의 짝짓기 프로에서는 남성 출연자들 중 여성의 선택을 받은 ‘사랑의 승자’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됐지만 요즘은 스타일을 구기더라도 사랑을 얻어내기 위해 어떤 노력도 마다하지 않는 인물에게 주목이 쏠린다.

한 프로에서는 21살짜리 한 여성 고정출연자의 어수룩한 짝사랑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좋아하는 남성을 앞에 두고도 자신의 감정을 전하지 못해 애를 태우다 못 마시는 술을 잔뜩 마시고 취해버리는 모습에 또래의 여성 시청자들이 자신의 얘기인양 공감하고 있는 것.

일본의 순애 열기를 점화한 주역은 작년 4월부터 NHK 위성채널에서 방영된 한국 드라마 ‘겨울연가’(일본 제목 ‘겨울소나타’)다.

소설 ‘세계의…’와의 공통점은 첫사랑의 슬픈 사연을 마치 한편의 수채화처럼 담백하게 그렸다는 점. 다만 ‘세계의…’는 10대와 20대 여성이 독자층의 60% 이상을 차지한 반면 ‘겨울연가’는 40∼50대의 중년 여성까지 여러 세대에 걸쳐 인기를 끌었다.

‘겨울연가’는 1만개가 팔리면 대성공이라는 일본 DVD업계에서 비디오를 합해 무려 15만개가 판매돼 위력을 입증했다. 시청자들이 시청 소감을 담아 NHK에 보내온 e메일과 전화도 2만여건에 이른다.

일본의 문화 평론가들은 일본 사람들이 순애보 작품을 찾는 이유로 ‘순수에 대한 갈망’을 뽑는다. 경제발전에 따라 물질적으로 풍요해졌고 커뮤니케이션 수단도 다양해졌지만 공동체의 해체, 전통의 붕괴, 인간미의 상실 현상이 두드러지면서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가 자신의 정신적 허전함을 메워주기를 기대한다는 것이다.

이 분석이 맞다면 한국에서도 ‘순애’가 받아들여질 여지는 여전히 많지 않을까.

도쿄=박원재특파원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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