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은 자유도청지역?

  • 입력 2004년 3월 1일 15시 33분


"사무실에 첫 출근해서 직원으로부터 '사무실과 자택이 모두 도청되니 주의하시라'는 말을 들었다. 각국이 모든 기술을 동원해 유엔 간부들의 전화를 도청하는 것이 유엔의 오래된 관습이다."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 전 유엔 사무총장의 말이다. 미국의 한 보안 전문가도 "지구상에 유엔만큼 비밀공작원이 많은 곳도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제외교 무대인 유엔에서 비신사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영국 첩보기관의 도청 대상이 된 것으로 알려진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이런 '전통'을 알기 때문에 이번 일을 크게 문제 삼지 않으려는 태세다. 프레드 에커드 유엔 대변인은 그의 지시에 따라 도청 사실에 대해 "실망스럽다"는 논평을 내고 "도청이 있었다면 중단해야 할 것"이라는 소극적인 발표만 했다.

전문가들은 아난 총장이 유선전화 또는 휴대전화를 쓰면 도청이 쉬운 편이며 보안전화를 쓰더라도 소리 전파가 낳은 미세한 창문의 떨림을 레이저 광선이 음성으로 재생해낼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도청사실이 알려진 계기 중 하나는 영국 통역관 캐서린 건의 고급기밀 누설. 그는 미 국가안전보장국(NSA)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이사국 가운데 6개국에 대해 도청을 해줄 것을 영국에 요청하는 메모를 외부로 유출시켰다가 공무원 기밀누설 혐의로 기소됐다. NSA가 도청을 요청한 시점은 2003년 1월로 미국과 영국이 이라크 전쟁에 대한 안보리의 지지를 얻지 못해 곤란에 빠져있을 때였다.

리처드 버틀러 전 이라크 무기사찰단장 역시 "사무실이 끊임없이 도청당하고 있다는 증거가 여럿 있었다"고 전했다. 버틀러 전 단장은 민감한 대화를 나누려면 주위가 소란한 유엔본부 지하층의 카페나 맨해튼 센트럴 파크를 찾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 등이 모두 도청에 열심이었다고 지적했다. 그의 후임인 한스 블릭스 전 단장도 도청을 우려해 유엔본부 부근에서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영국의 한 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밝혔다.

영화의 소재로 자주 등장했던 냉전시대 소련의 스파이들 중 상당수가 유엔을 무대로 활동했다. 이번 도청 파문에 대해 세르게이 라브로프 유엔주재 러시아 대사는 "도청은 불법"이라면서 "이번 일로 보면 영국의 도청 기술만큼은 수준급인 모양"이라고 말했다고 뉴욕 타임스가 보도했다. 마치 '기술이 있다면 누구든 도청한다'는 전제가 있는 듯한 말이었다.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 등 유엔 창설 과정을 담은 '창조과정'이라는 책에서 저자 스테픈 슐레진저는 "유엔이 생긴 날부터 도청이 시작됐다"고 지적했다. 당시 3개 기관이 도청을 담당했는데 그중 미 육군 통신부대는 회의에 참가한 46개국의 외교관들의 유선전화를, 미 연방수사국(FBI)은 미국인 방문객들의 전화를 모두 도청했다고 그는 밝히고 있다.

디지털뉴스팀

뉴욕=홍권희특파원 koniho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