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월드워치]중국 조기유학 빛과 그림자

  • 입력 2003년 3월 17일 18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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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다오커우 거리에 선 황유성 특파원.
우다오커우 거리에 선 황유성 특파원.
《중국이 경제대국으로 부상하면서 한국 조기 유학생들이 부쩍 늘었다. 중국어 사용 가능자에 대한 사회적 수요의 급증과 부모들의 기대심리, 한국 교육의 문제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하지만 사전준비도 없이 무턱대고 ‘중국열(熱)’에 편승한 경우가 많은 데다 민감한 자아형성기에 부모들과 떨어져 생활함으로써 탈선 등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듬직한 보호자가 있어야=베이징(北京) W학교 고교 2학년인 김영태군(16·가명)은 지난해 3월 중국에 왔다. 한국에서 성적이 꼴찌권을 맴돌았고 집에서는 말썽꾸러기로 낙인찍혔던 김군이었다. 답답했던 김군의 아버지는 “중국말이라도 배우면 나중에 취직은 하겠지”라는 생각으로 중국 주재원인 친한 대학 후배에게 아들을 맡겼다.

“처음부터 중국어가 재미있었어요.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도 있고 해서 열심히 했더니 학교 한어(중국어)시험에서 100점도 맞고, 선생님이 칭찬을 해주셨어요. 한국에서는 한번도 칭찬을 못 들어봤는데….”

김군은 “중국어를 잘하게 되니까 공부에 자신감이 생기고 수학 등 자신 없던 다른 과목도 덩달아 잘하게 됐다”며 “중국에 오기를 잘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군처럼 중국에서 성공적으로 적응하는 경우는 오히려 드문 사례라 할 수 있다.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믿음직한 보호자가 없는 경우 탈선하는 사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김군은 “한국 학생 10명 중 한두 명이나 제대로 공부할까, 다른 애들은 금요일 오후 기숙사에서 나오면 주말 시간을 대부분 친구들과 놀러 다니는데 쓴다”고 했다.

교민 이경자씨(49·여)는 “주말이면 한국인들이 많이 몰리는 왕징(望京)이나 중국 대학이 밀집한 우다오커우(五道口) 거리를 쏘다니며 담배와 술을 배우고 심지어 사우나에서 잠을 자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학생이 상당수”라며 “혼숙을 하는 학생까지 있다”고 귀띔했다. 그는 “솔직히 부모나 친지가 중국에 없다면 조기 유학을 권하고 싶지 않다”며 “중국은 미국이나 유럽처럼 학교에서 학생들을 돌봐주는 시스템이 완비돼 있지 않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 조기유학생들이 많이 다니는 베이징 차오양구의 한 중고교. 금요일 오후 기숙사에서 나온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교문 앞에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다. -베이징=황유성특파원

▽유학생 하숙산업 인기=중국 유학기금관리회에 따르면 지난해 말 중국의 외국 유학생 8만5829명 중 한국 학생은 국가 순위 1위인 3만6093명이었다. 우다오커우의 조용국(趙龍國·47·조선족) 중국유학원장은 “2001년부터 중국 조기 유학 붐이 본격적으로 일기 시작했는데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매년 학생수가 2배 이상 불어나는 느낌”이라면서 “처음에는 고교생이 대부분이었지만 요즘은 초등학생까지 유학을 온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조기 유학생을 위한 하숙산업이 인기다. 조기 유학을 오려면 신청서류에 반드시 보호자를 명시하고 공증을 받아야 한다. 부모 처지에서도 자녀와 함께 중국에 올 수 없는 경우 유학원에서 알선하는 조선족이나 중국인의 명의를 빌려 후견인을 선정할 수밖에 없다. 최근 왕징이나 우다오커우에서는 아파트를 몇 채 빌려 후견인 구실을 하며 전문적으로 하숙을 치는 한국인이나 조선족이 크게 늘고 있다. 심지어 부동산 업체들까지 학생 하숙 산업에 끼어드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씨는 “이들 대부분이 돈을 목적으로 하숙을 하기 때문에 학생들의 성적과 학교생활, 애로점 등을 제대로 돌봐주기를 기대하기는 애초부터 무리”라고 말했다.

베이징 서쪽 하이뎬구의 우다오커우 거리는 한국 유학생들로 늘 붐비는 곳이다. 주변에 베이징어언대학을 비롯해 베이징대, 칭화대, 인민대 등 중국 주요 대학들이 밀집해 있다. -베이징=황유성특파원

▽과연 취직이 잘 될까=C기업 중국 주재원인 김상호씨(30)는 중국 조기 유학 1세대라 할 수 있다. 그는 한중 수교 이듬해인 1993년 유학 와 중국에서 대학을 나온 뒤 곧바로 C기업에 특채돼 중국에서 3년째 근무 중이다.

“월급 외에 주재원 수당을 1만위안(약 150만원) 정도 더 받기 때문에 한국에서 직장 생활하는 친구들보다는 수입이 훨씬 많다”면서 “대학 동기인 중국 친구들이 많기 때문에 비즈니스를 할 때 도움을 많이 받는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 조기 유학에 대해 비교적 긍정적이다. 김씨는 “중국의 경제규모가 계속 커지고 있고 한국 기업들의 대중국 사업 비중이 늘면서 중국을 아는 인재 풀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기업체 간부들의 생각은 최근 많이 달라졌다. 유학생 출신보다는 자체인력 연수 쪽에 더 치중하고 있다. 중국 주재 한국 대기업체의 한 간부는 “한국 유학생들이 전문지식이 부족한데다 외국 생활에 익숙해져 기업의 조직문화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솔직히 한달 월급 6000∼1만위안(약 90만∼150만원)이면 영어도 잘하고 컴퓨터도 잘하는 중국 명문대를 나온 현지인들을 골라서 쓸 수 있다”면서 “중국어만 하면 취직이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현지서 뒷바라지 엄마의 고충▼

베이징 왕징(望京)에 사는 박순영씨(44·가명)는 지난해 3월 고1 아들과 중2 딸을 데리고 중국에 왔다. 남편은 한국에서 조그만 자영업을 하고 있다.

박씨는 오전 6시반경 일어나 도시락을 싸서 애들을 학교에 보내고 나면 자신도 8시반경 집 근처 중국어학원에 간다. 학생의 절반 이상이 박씨처럼 ‘기러기 엄마’들이다.

생활하는 데 중국어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비자 연장을 하려면 단과대학 인가를 받은 중국어학원에 적(籍)을 두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또 적적한 외국 생활에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 다소나마 스트레스도 풀린다.

“애들만 보내는 게 마음이 안 놓여서 남편과 떨어져 중국에 왔지만 우울증을 호소하는 엄마들이 많아요. 하루종일 애들만 기다리다가…. 시장 가고 쇼핑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애들 장래를 생각해 오긴 했지만 아직도 잘한 결정인지 판단이 잘 안 서요.”

두 집 살림을 하다 보니 경제적 어려움도 적지 않다. 애들이 다니는 S중고교는 1년 학비가 약 8000달러이다. 용돈 등 잡비까지 합치면 1명당 한달에 100만원이 넘는 돈이 들어간다. 학교 공부 외에 중국어와 영어, 수학 과외도 받아야 한다. 남편은 학비를 포함해 한달에 400만원을 부쳐준다. 박씨의 남편은 식구를 다 보내고 홀로 서울에서 원룸아파트 생활을 하고 있다. 그래도 두 집 생활을 하려면 600만원 정도는 든다는 게 박씨의 말이다.

“남편은 1년에 2, 3번씩 중국에 와요. 애들은 자주 안 보니까 아빠와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아요. 남편이 오면 애들의 학교 성적부터 따지는데 그러다 보면 충돌도 빚어지고….”

그래도 박씨는 애들이 말없이 학교에 잘 다니는 것이 고맙고 유일한 위안이다.

“2년 뒤 큰애가 대학에 들어가면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에요. 우리 인생도 찾아야 하잖아요.”

▼박사과정 유학생 이주화씨의 조언▼

“청소년이라고 해도 조기유학은 어디까지나 유학이므로 결코 국내에서와 같은 의무교육 과정으로 쉽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낯선 풍토에서 자칫 인성교육이 소홀해질 수 있는 만큼 위험 부담이 크다는 뜻이죠. 자녀의 미래를 위해 어떤 선택이 좋은지를 면밀히 검토해 신중히 결정해야 합니다.”

베이징(北京)의 명문대학 박사과정 유학생이면서 조기유학생 조카를 데리고 있는 이주화(李周和·37·사진)씨의 말이다.

“대부분의 조기유학이 자녀의 뜻보다는 부모의 의지로 이뤄집니다. 중국이 ‘기회의 땅’이라는 환상에 자녀의 미래를 맡기는 경우가 많다는 거죠. 부모의 치밀한 준비와 지속적인 관리가 없이는 실패할 가능성이 큽니다.”

이씨는 자신과 주변의 경험담을 빌려 조기유학을 준비하는 학부모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첫째, 부모가 먼저 중국을 공부해야 한다. 중국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중국어만 배우면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로 자녀의 조기유학을 결정해서는 안된다. 또 유학원의 말만 듣거나 도피성 유학으로 섣불리 자녀를 중국에 보내서는 실패하기 쉽다.

둘째, 국내에서보다 더 깊은 관심을 자녀에게 기울여야 한다. 사춘기에 외국생활을 하는 만큼 단절감과 외로움을 느끼기 쉬운데다 중국은 술과 담배, 유흥시설에 대한 사회적 통제가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이상적인 것은 부모가 중국에서 함께 생활하는 것이다.

셋째, 자녀가 유학생활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미련 없이 귀국하는 것이 낫다. 자녀가 외국생활에서 혼란을 느끼거나 목표 의식을 갖지 못하고 방황한다면 부모의 욕심만 앞세우지 말고 더 늦기 전에 돌아오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하다. 약간의 언어는 배울지 몰라도 사회적 부적격자를 만드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베이징=황유성 특파원 ys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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