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유로貨가입 찬반논쟁 재연

  • 입력 2000년 7월 5일 19시 24분


한동안 수면 아래 머물러 있던 영국 파운드화의 유로화 체제 가입 문제를 놓고 영국에서 찬반논쟁이 다시 뜨겁다. 특히 유로화 약세-파운드화 강세 현상이 계속돼 영국의 제조업 기반이 흔들린다는 우려가 높아지자 서둘러 유로화 체제로 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대두했다.

파운드화는 지난해 1월 유로화 출범 이후 최근까지 유로화에 대해 10.8%나 가치가 올랐다.

파운드화 가치가 올라갈수록 영국산 물건은 유로화 국가들보다 상대적으로 비싸져 가격경쟁력을 잃는다. 영국에 투자한 외국기업이 근로자에게 지불해야 할 임금도 상대적으로 올라가는 셈이다.

▽세력 얻어가는 가입 찬성론〓유로화 체제로 들어가자는 찬성파는 파운드화 가치가 유로화보다 너무 높아 장기적으로 산업기반이 심각하게 훼손될 것이라는 입장이다.

스티븐 고머솔 일본주재 영국대사는 본국에 낸 한 보고서에서 “영국 정부가 유로화 체제 가입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밝히지 않으면 많은 외국기업이 영국을 떠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고머솔 대사는 “최소한 내년 총선 이후에 유로화 체제 가입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는 기존 약속을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면서 “영국 정부가 이런 일정을 조금이라도 미적거리면 외국인투자는 당장 중단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외국인투자 유치를 총괄하는 앤드루 프레이저 영국투자유치청(IBB) 청장도 스티븐 바이어스 통상산업부장관에게 낸 보고서에서 “유로화 체제 가입을 위해 더 노력하지 않으면 영국에서 철수하는 외국기업이 늘어날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닛산 영국법인의 카를로스 고쉰 사장은 지난 주 “파운드화의 강세 때문에 신규투자를 다른 유로권 국가로 돌릴 것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미국 포드사에 인수된 랜드로버 자동차의 밥 도버 신임 회장도 취임 첫날인 3일 랜드로버를 살리기 위해 영국 내 부품조달을 줄이겠다고 밝혔다.

▽완강한 유로권 가입 반대론〓유로화 체제 가입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영국의 정치 경제적 독립과 정체성을 잃을 것을 걱정한다. 이들은 “강력한 파운드화만이 영국의 번영을 보장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유로화체제에 가입하면 비정상적인 호황 또는 경기침체 때 독자적인 통화금리정책을 쓸 수 없다는 것이다.

파운드화를 포기하면 영국의 세금 관할권도 넘겨줘야 하고 이럴 경우 다른 유로권 국가들의 수준에 맞춰 세금을 지금보다 16.6% 가량 인상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들 반대론자들은 “영국 기업들은 새 통화시스템에 적응하는 데 수십억파운드의 비용을 써야 하지만 유로화 체제 가입에서 나오는 비용절감 혜택은 극소수의 기업만 받게 된다”고 주장한다.

▽딜레마에 빠진 영국 정부〓토니 블레어 총리가 이끄는 현 노동당 정부는 유로화 체제 가입문제에 관한 논의를 내년의 총선 이후로 미뤄왔다. 2002년에 국민투표를 실시해 2004, 2005년경 유로화에 가입한다는 구상이다.

노동당은 찬반 여론이 팽팽하게 맞서 있는 유로화 체제 가입 문제를 선거 전에 거론해봐야 표만 잃고 말 것을 걱정하고 있다. 지난달 실시된 한 여론조사에서는 국민의 60%가 아직도 유로화 체제 가입에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제조업의 가격 경쟁력이 뚝뚝 떨어지고 있지만 국민의 정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 블레어 총리에게는 이런 상황에서 다시 불거진 유로화 체제 가입문제 공론화 분위기는 골칫거리다. 내각에서조차 의견이 분분해 블레어 총리의 방향타가 흔들리고 있다.

<신치영기자>higgle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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