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남기 中정협부주석 대담]"北주민 남북정상회담 지지"

  • 입력 2000년 5월 7일 18시 38분


《충북 청원 태생으로 중국 군부의 실력자 중 한사람이며 인민정치협상회의 상무 부주석인 조남기(趙南起)장군이 2일 제주 신라호텔에서 본사 김재홍(金在洪) 논설위원과 특별대담을 가졌다. 이날 두 시간에 걸친 대담에서 조 부주석은 남북정상회담과 반세기가 지난 6·25전쟁의 청산문제, 한-중관계 등에 관해 소상히 견해를 밝혔다. 그는 또 중국내 소수민족인 조선족으로서 중국 국가요인의 직위에 오르기까지 겪었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도 소개했다. 조 부주석은 대담 중 남북관계나 한-중관계에 민감한 대목은 보도를 자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편집자>

―동아일보 애독자들을 위해 어려운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아래서 중화인(중국국민)이 되셨지만, 한국 출신 원로로서 남북관계 개선에 대해서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라도 무언가 역할을 하실 기회가 많을 것 같은데요. 우선 지금 실무접촉이 진행중인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말씀해 주시지요.

"남북정상회담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회담은 남북의 국민이 깊은 마음 가운데서 환영을 보내고 이것을 다 지지합니다. 모두 이런 소원이 있고, 저도 98년에 북한에 가보니까 북반부 주민들도 통일은 다 원합디다. 그리고 이런 것을 통해서 쌍방의 최고지도자들이 해놓으면(실적을 이루어놓으면) 오해가 해제되고 신임이 증가되니까 점차적으로 해가 가면 한반도에 평화가 오고 고통이 덮어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지 않고 서로 자꾸 대립하고 욕하고 싸우면 날이 갈수록 멀어지고 악감이 생기지요. 사람은 감정의 동물인데 오해가 쌓이는 거지요. 이렇게 만나고 대화하면 공통부분이 많아지리라 봅니다.”

―남북정상회담 합의가 발표됐을 때 중국 지도자들이나 관료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이 한반도에 화평과 완화(긴장완화)가 되는 것이 한국과 조선(북한) 뿐만 아니라 중국내 조선족과 중국, 나아가서 동북아시아에 화평과 발전을 가져 올 것입니다. 이게 한국과 북한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이 넓은 지역에 좋은 영향을 가져온다는 거지요. 그러니 중국으로서는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환영합니다. 중국은 과거부터 시종일관 회담을 통해서 반도에 화평과 번영을 위해서 건설적인 작용을 하고 있어요. 제가 한국에 와서 웃분들도 만나보고 남북정상회담이 큰 의미가 있다고 말도 많이 했습니다.”

―이제 한달여 후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이 평양에서 갖는 정상회담을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김대통령은 지금까지 일관되게 포용정책을 펴면서 화해와 교류협력을 강조해 왔습니다만, 과연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지가 궁금합니다.

“한국에 이런 속담이 있잖아요. ‘시작이 절반’이라고. 시작이 절반이라는 게 그렇게 완전하게 관련되지는 (만족스럽게 이루어지지는) 않겠지만 일은 시작에 큰 의미가 있는 법입니다. 그리고 이런 시작이라는 게 결국은 쌍방이 다 의사가 맞으니까 이런 체결이 된다고 봐요. 한쪽에만 이런 의사가 있으면 이루어지지 않지요. 한국말에 손바닥이 두개가 부딪쳐야 소리가 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한쪽만 그런 결정을 하고 저쪽에서 그렇게 안 해주면 성사가 안되지요. 북한에도 이런 동기가 분명하게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도(남한에서도) 누가 잘하고 누가 잘못하고 이런 식이 아니라 함께 이기는 식으로 얘기해야 합니다.그러지 않고서 이건 다 내가 했다고 하면, 나는 그렇게 옳다고는 안봐요.”

―남북정상회담에서 유의해야 할 점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아까 말한 쌍방의 기초가 있기 때문에 아마 점차적으로 잘 될 거라고 생각해요. 이번 회담에서 한꺼번에 화답하는 건 어렵지만 한두가지씩, 그러니까 한번 회담에서 한두가지씩 해결해 가면 발전하는 거죠. 장기적으로 만나고 대화하고 그러면서 쌓아가야 할 겁니다.”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인물평을 해 주신다면….

“아마 실리를 얻어내는데 남다른 의지력을 보일 것입니다.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요.”

조 부주석은 이 부분에서 매우 신중했다. 현재 북한의 국가지도자라면서 자세한 언급을 삼갔다. 그리고 남한의 언론도 북한의 최고지도자에 대해 용훼할 가능성이 있는 보도를 할 때는 심사숙고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번 남북정상회담 합의에 대해서 중국이 어떤 역할을 했습니까.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려운데, 이번에 그것이 베이징에서 계속 협의됐지 않습니까. 그것만 가지고도 중국이 어떤 역할을 하느냐를 상징한다고 봅니다.”

―아까 남북간에 정상회담을 하면 서로 마음도 완화되고 신뢰감이 생긴다고 말씀하셨는데 지금까지 극단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것은 6·25전쟁을 치른 후에 이렇게 됐다고 봅니다. 그 6·25전쟁이 올해로 50주년이 됐습니다. 반세기가 지난 전쟁인데 이제 어떻게 하면 그것으로 인한 적대관계를 화해로 돌릴 수 있을지 좋은 방안이 없겠습니까.

여기서 그는 조금 주저했다. 6·25전쟁 당시 그는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의 지휘아래 북한측을 도운 중국 인민지원군의 장교로 참전했다. 20여만의 중국 인민군 병력이 북-중국경을 넘어 왔다. 조부주석은 부사령관 겸 후근부장인 훙쉐즈(洪學智)의 막료로 기획수송과장이었다. 거기서 능력을 인정받아 중국 군부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6·25전쟁때 북-중연합군의 참전원로인 그가 내놓는 언급은 그래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저는 여기에 대해서 말할 입장이 아닙니다. 그러나 될 수 있는 대로 과거를 마치고 미래를 개척하는 정신으로 해야 된다고 봅니다. 한꺼번에 다 될 수는 없지만 아까 말씀드린 대로 차차 접촉하고 내왕이 있으면 과거를 마치게 되겠지요. 과거를 마치지 않고서 자꾸 돌리면 서로 악감정이 나고 기분이 상하니까 그게 어디 됩니까. 과거를 끝마치고 앞을 보고서 나가야 합니다. 앞은 무엇이냐 하면 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점차적으로 정착시켜 나가면서 마지막에 쌍방이 자주적으로 평화통일을 조성해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 과거를 자꾸 돌아보고 싸우면 발전할 수 없어요.”

―6·25때 김일성(金日成) 수상을 비롯해서 북한측 지도자들과 친밀하게 접촉하셨습니까.

“어떤 자료는 내가 통역원을 했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고 인민군 지원사령부의 작전부 일을 보다가 나중에 후근부 과장을 했습니다. 통역을 한 기억은 당시 박헌영(朴憲永)제1부수상 겸 외상이 있었는데 그 분이 남로당 출신이라서 중국말을 못해요. 북한의 다른 지도자들은 다 중국말을 하지요. 그래서 내가 한 두 번 통역을 해 준 일이 있습니다. 김일성 수상은 나를 쇼또(趙君)라고 부르며 굉장히 귀여워했어요. 전쟁이 끝나자 중국에 돌아가려는데 ‘쇼또는 가지 말고 조국에 남아서 통일과 건설 사업을 함께 하자’고 하는 겁니다. 적당한 자리를 줄 테니 군대에서 하겠으면 군대에서 하고, 하여튼 조선에 오면 직을 높여 줄 테니까 오라는 거였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거기가 내 마음에 맞지 않았습니다.”

―왜 맞지 않았습니까. 중국쪽이 더 유망해 보였습니까.

그게 아니고 중국에서는 상하간에 서로 동지라고 하면서 반말도 쓰고 하는데 북한은 그러지 않았어요. 등급(계급)에 따른 상하관계가 엄격하지요. 구체적으로 더 말하기는 그렇고, 하여튼 중국하고는 많이 달랐어요. 내가 중국 군부에서 교육받은 사람이 그런 걸 보니까 성격에 맞지 않아요. 그래서 아무리 자리를 높여주어도 오래 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김일성 주석과 그후 계속 접촉이 있었습니까.

“마지막으로 만난 게 언젠가 하면 그 분이 1984년 5월초에 모스크바 갈 때입니다. 그때 나는 길림성 군구 정치위원(군단장급)으로 있었어요. 김 주석이 기차로 가니까 내가 국경도시 도문(圖們)에 가서 영접했습니다. 환영하고 거기서 쉰 뒤 떠나는 걸 환송했습니다. 내가 문화혁명때 66년부터 72년까지 연금생활을 했는데 그것을 다 압디다. ‘몇해동안 고생했지. 그후 여기 와서 사업 잘한다면서’ 하고 위로해 주었어요. 그 자리에 선양(瀋陽)군구 사령을 비롯해서 여러 사람이 있기 때문에 딴 말을 하기는 곤란하니까 간단하게 대화했지만 이심전심으로 다 통했습니다.”

―문화혁명때는 왜 탄압받게 됐습니까. 마오쩌둥(毛澤東)주석의 혁명노선에 반대했으니까 그랬을 텐데요.

“처음에는 내가 적극적으로 문화혁명을 옹호하고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한참 하다가 보니까 이게 옳지 못하단 말이에요. 중앙으로부터 밑에까지 90%이상의 간부를 다 타도하고, 어느 나라가 그 나라를 꾸린 사람들을 다 변절자라고 타도하고 이런 저런 자본주의 노선을 걷는 당권파라고 인민재판하고 그런단 말입니까. 그리고 생산을 하지 않을뿐더러 생산하는 사람들을 탄압했어요. 그때 장칭(江靑·마오쩌둥의 처)을 비롯한 4인방은 ‘사회주의의 풀을 가져도 자본주의의 벼는 갖지 않겠다’는 구호까지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양식은 생산하지 않아도 사회주의만 건재하면 된다는 거지요. 공장에서 굴뚝에 연기만 나면 그 사람들이 찾아갑니다. 어째 생산으로 혁명을 압도하려 하느냐고 그랬어요. 가만히 보니까 이게 무슨 경우인가, 사회의 후퇴 아닌가, 그래서 안 따르기로 결심했지요.”

―그때 직책은 무엇이었습니까.

"지린(吉林)성 옌볜(延邊)군구 정치위원(사단장급)이었지요. 그런데 가까이 살던 옌볜 자치주에 서기로 주덕해(周德海·동북항일연군의 조선인부대장 출신)라고 있었어요. 조선사람으로 1932년부터 혁명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 사람을 타도하자고 해서 내가 격렬히 반대했지요. 그러자 주변의 상관들이 나한테 타협해서 주덕해를 비판하는 대자보를 쓰기만 하면 승진시켜 주겠다고 회유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양심을 가지고 어떻게 자기 벼슬을 갖자고 투항합니까. 그래서 끝까지 저항하다가 모든 군직 관직에서 해직당하고 6년간 학습방에서 노동개조라고 사실상 연금당한 채 자유없이 살았습니다.”

―처음 중국 인민군에 들어가게 된 계기를 좀 밝혀주시죠. 공산당에 먼저 가입했습니까, 아니면 군과 먼저 인연을 맺었나요.

“나는 처음부터 공산주의자가 아니고 민족주의자였습니다. 1945년 일본군이 패망해 물러갔는데 그 지방에 토비(土匪)들이 노략질을 해댔습니다. 그래서 한 300∼400호 되는 조선인 가정을 보호하기 위해서 조선인 자위대를 조직했습니다. 그러는 중에 45년11월 주보중(周保中·동북항일연군과 소련군 제88국제여단 지휘관 출신)사령 지휘 아래 동북민주연군이 국민당군대를 몰아내고 그 지역에 진주했어요. 그런데 이 군대는 기강이 있고 주민을 존중하는 태도가 남달랐습니다. 그래서 조선인 마을에서 식량을 거두어 갖다 주고 자위대원 80명을 데리고 입대했지요. 주보중 장군은 나를 병사로 편입하지 않고 동북군정대학에 입학시켜 군관 교육을 받게 해주었습니다.”

▼조남기 부주석 약력

1927.4.20 충북 청원군 강내면 태성리 89 출생

1938 중국 지린(吉林)성 옌지(延吉) 현 황지포로 조부를 따라 이주

1945. 11 동북군정대학 지린분교 입교

1946. 11 군정대학 월반 졸업, 지린성 토지공작대원

1950.10∼53.7 6·25전쟁 당시 중국 인민 지원군 후근부 기획수송 과장

1953∼68 지린성 옌볜 군분구(軍分區) 정치부 주임, 정치위원장

1955∼56 총후근학원 졸업, 교원근무

1968∼72 문화대혁명으로 모든 군직 관 직에서 해직

1973 퉁화군구 정치위원(사단장급)으 로 복권

1978 지린성군구 부정치위원(부군단 장급), 옌볜자치주 제1서기

1982 지린성군구 정치위원(군단장

급), 지린성위 서기

1985 인민해방군 총후근부(군수병참

장비 총괄부서) 부부장

1987∼92 총후근부장, 상장 승진

1988 인민해방군 중앙군사위원(부총 리 대우)

1992 인민해방군 군사과학원장

1997 군 업무퇴진, 상장계급 유지

1998 인민정치협상회의 상무 부주석 (군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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