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일본인 쉰들러」 있었다

  • 입력 1999년 10월 14일 19시 35분


‘우리는 왜 쉰들러의 리스트는 기억하면서 후세(布施)의 리스트는 기억하지 못하는가.’

서울 NGO대회의 홍보관이 마련된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의 한 부스에 법관복장의 일본인 영정과 함께 걸린 문구다. 그 아래에는 작은 서명대도 마련됐다.

이 이색적인 서명대는 일제 때 한국에서 독립운동가와 한국 민중의 권익을 위해 활약했던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布施辰治·1880∼1953)의 용기와 양심을 추모하기 위한 것.

일제탄압의 상징물인 서울 서대문교도소를 아우슈비츠수용소처럼 유네스코 역사기념물로 보전하자는 운동을 펼치고 있는 역사교훈실천운동 범시민연합이 벌이는 이 서명운동에는 14일까지 100여명이 참여했다.

후세변호사는 정준영(鄭畯泳·60)역사교훈실천운동대표가 일본을 방문했다가 우연히 이와나미(岩波)서점에서 발간된 ‘어느 변호사의 일생’이라는 전기를 읽고 찾아낸 인물.

정씨는 후세변호사가 일본인의 신분으로 일제시대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일제의 인권탄압에 맞서 싸우다 옥고까지 치렀다고 소개했다.

그는 1920년대 비타협 폭력노선 항일운동을 펼치던 의열단관련 사건의 변론을 맡는 등 독립투사들의 변호에 앞장섰다. 또 1923년 관동대지진때는 “조선인들이 습격해 온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고 일본군 계엄사령부와 경찰을 정면으로 비난해 ‘요주의인물’로 분류됐다.

후세변호사는 일제가 동양척식회사를 내세워 조선농민의 농지를 수탈할 때 전라도지역 농민들을 위해 510만평 농지반환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 동양척식회사의 행위를 ‘합법적인 사기행위’로 몰아붙여 일본의 양심이 살아 있음을 행동으로 보여줬다.

후세변호사는 또 1920∼30년대 계급타파와 공평사회 건설을 위한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이었던 형평(衡平)운동에 참여할 정도로 조선민중에 대한 애정이 돈독했다.

조선총독부와 일본 정부의 미움을 산 그는 결국 33년과 39년 두차례나 투옥됐고 변호사자격까지 박탈당했다.

한편 경희대 허동현(許東賢·한일비교사)교수는 “후세변호사는 천황암살기도로 유명했던 박열(朴烈)사건의 변호를 맡는 등 한국과 대만 등 피압박민족의 인권문제에 앞장서 온 양심적 지식인”이라면서 “그동안 국내학계에서는 그의 좌파성향 때문에 집중 조명을 받지 못했다”고 소개했다.

〈권재현기자〉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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