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하르토 하야]초라하게 막내린 「32년 鐵拳」

  • 입력 1998년 5월 21일 19시 26분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21일 짤막한 사임성명 발표로 32년간에 걸친 기나긴 철권통치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가 사임을 발표하는 장면은 인도네시아 국내는 물론 CNN에 의해 전세계에 생중계됐다. 권좌에서 쫓겨나는 늙은 독재자의 회한과 최후의 변을 전세계인들이 지켜본 것이다.

21일 오전 9시(한국시간 오전 11시)에 시작된 사임성명에서 77세의 늙고 고집스러운 독재자는 실제 국민 앞에 무릎을 꿇지는 않았지만 그토록 오랫동안 2억 국민 위에 군림한 ‘전제군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유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으나 어쩔 수 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나한테 어떠한 실수들과 부족한 점 및 실패들이 있었다면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고 국민에게 용서를 빌었다.

초록색 남방셔츠에 인도네시아 민속모자(페시)를 눌러쓴 수하르토는 준비한 성명을 보느라 시종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는 가끔씩 흘러내리는 안경을 위로 올리며 평정을 찾으려는 듯 호흡을 가다듬기도 했으며 ‘사임’이라는 말을 언급할 때는 목소리가 떨렸다.

국어인 바하사 인도네시아아로 사임성명을 발표한 수하르토는 자존심을 지키고 싶어서인지 ‘사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대신 잘 쓰지 않는 ‘용퇴’라는 표현을 썼다. 사임의 변 또한 완곡하기만 했다.

“나는 이 나라를 계속 영도하고 발전을 주도하는 일이 말할 수 없이 어려워지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대한 결심……그러니까 인도네시아 공화국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기로 했습니다.”

수하르토는 이어 대통령직을 하비비부통령에게 이양한다는 등 나머지 내용을 담담한 목소리로 낭독해갔으나 가끔씩 회한과 독기가 서린 눈을 들어 주위를 초점없이 둘러봤다.

그가 사임성명을 읽는 동안 건너편에 서서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경청하던 하비비부통령은 곧바로 수하르토대통령과 악수 한 뒤 대통령직 취임선서를 시작했다.

하비비 신임 대통령이 취임사를 읽어내려가는 동안 불과 몇 초전에 ‘전대통령’이 된 수하르토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는 감정이 북받쳐오르는듯 왼손을 들어 입주변을 세게 문질렀다.

신임 대통령의 취임사에 이어 대통령직 이양의 합헌성과 이에 대한 군부의 지지를 천명하는 위란토 통합군사령관의 짧은 성명이 끝날 때까지 수하르토는 자리를 지켰다.

수하르토는 애써 당당하려 했지만 인도네시아 국민은 자신들의 힘으로 몰아낸 그의 얼굴에서 ‘독재자의 초라한 말로’를 발견했을 것이다.

〈윤성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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