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4자예비회담/간략한 역사]

  • 입력 1997년 8월 3일 20시 08분


우리 정부가 4자회담을 제의한 것은 지난해 4월16일. 당시 청와대외교안보수석으로 있던 柳宗夏(유종하)외무장관이 앤서니 레이크 미국 백악관외교안보담당보좌관을 수차례 설득, 빌 클린턴대통령의 제주방문과 韓美(한미)정상의 4자회담 공동제의를 성사시켰다. 이에 대한 북한의 반응은 예상밖으로 신중했다. 북한외교부대변인은 이같은 제의를 바로 거부하지 않고 『4자회담의 취지와 목적이 명백치 않다』(96년4월18일) 『미국측으로부터의 설명이 있기를 좀더 기다려보고자 한다』(96년5월7일)고 밝혔다. 이에 한미 양국은 북한에 대한 공동설명회를 갖기로 하고 이같은 의사를 전달했으나 북한측은 참가여부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밝히지 않은채 몇달째 시간끌기만을 계속했다. 그런 상황에서 지난해 9월18일 동해안 잠수함 침투사건이 터짐으로써 4자회담 추진은 큰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같은해 12월 10차례의 北―美(북―미)접촉(12월9∼29일)을 통해 북한의 잠수함사건 사과문제를 매듭짓는 과정에서 북한측은 공동설명회 참여를 약속했다. 북한은 올 1월과 2월 두차례나 공동설명회 개최약속을 일방적으로 취소한 뒤 3월5일에야 공동설명회에 나왔다. 이어 4월16일에는 공동설명회 후속회의까지 열렸으나 북한이 대규모 식량지원과 경제제재 해제를 전제조건으로 계속 고집하는 바람에 4자회담 및 예비회담은 또다시 물건너가는 듯 했다. 그러나 식량난과 경제난에 허덕이는 북한은 결국 6월30일 남북한과 미국의 3자 준고위급회담에서 예비회담 개최에 동의했다. 〈문 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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