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 이후 문명의 눈부신 발전이 인간의 생활환경을 극적으로 바꿔놓았으며, 그 변화 속도가 인간의 생물학적 적응 속도를 앞질러 여러 부작용을 낳고 있다는 새로운 가설이 제기됐다.
영국 러프버러대학교와 스위스 취리히대학교 공동 연구팀은 최근 학술지 바이오로지컬 리뷰(Biological Reviews)에 발표한 논문에서 “인간은 원래 자연환경에 적응해 진화해 왔지만, 산업화 이후 불과 몇 세대 만에 환경이 너무 빠르게 바뀌어 우리가 생물학적으로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연구진은 이를 환경적 불일치(Environmental Mismatch) 가설이라고 부르며, 자연에 맞춰 설계된 우리의 몸과 정신이 현대 도시 환경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할 때 다양한 건강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연구진에 따르면, 수십만 년 동안 인류는 수렵 채집 생활이 요하는 높은 이동성, 간헐적이며 단기간에 해소되는 스트레스, 낮은 오염도, 자연광과 어둠의 리듬, 자연과의 지속적 접촉에 적응해 왔다. 인간의 신체 기능과 스트레스 반응, 면역 체계는 이러한 조건에 맞게 진화했다.
하지만 산업혁명 이후 불과 200~300년 만에 인간의 생활환경은 완전히 달라졌다. 오늘날 도시에는 교통·산업 소음, 빛 공해, 미세먼지와 대기 오염, 초가공식품, 좌식 생활, 끊임없는 감각 자극(디지털 미디어) 등이 일상화 됐다.
취리히대 콜린 쇼(Colin Shaw) 박사는 “우리 몸의 스트레스 반응 시스템은 사자와 맞닥뜨렸을 때처럼 급성 스트레스를 처리하도록 설계되어 있다”면서 “자연에서 사자는 가끔 나타나거나 곧 사라졌다. 그러나 현대에서는 소음, 업무 스트레스, 교통 체증까지 모두 급성 위험 신호(사자)처럼 받아들여져 스트레스 시스템이 꺼지지 않은 채 장시간 활성화된다”라고 말했다.
연구진은 기존의 인류학·생리학·생태학·공중보건 연구를 종합해 현대 도시 환경이 인간의 핵심 생물학적 기능에 다음과 같은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정리했다.
첫째, 생식 기능 저하: 세계적으로 출산율 및 정자 수와 운동성 감소. 연구진은 인과관계가 완전히 규명된 것은 아니지만 일부 환경 물질(살충제·난연제·미세플라스틱 등) 노출 증가와의 연관성이 지적된다고 설명. 둘째, 면역 기능 이상: 알레르기·자가면역질환· 만성 염증 수준 증가. 자연과의 접촉이 줄어 생물 다양성에 기반한 면역 자극이 약해졌다는 ‘위생 가설’도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이론 중 하나. 셋째, 인지 기능 손상: 만성 소음 등으로 인한 집중력 저하, 빛 공해 등으로 인한 수면 약화, 장기적 스트레스 등에 의한 인지 발달 둔화 및 노화 가속화. 넷째, 신체 기능 저하: 좌식 생활 증가 등 신체 활동 감소에 따른 지구력과 근력 감소.
연구진은 또한 자연환경과 산업화한 환경을 비교한 실험·역학 연구를 통합한 결과, 도시의 일상적 스트레스가 신체에 단·장기적으로 영향을 준다고 설명한다.
단기 영향은 불안 증가, 수면의 질 악화, 집중력 및 인지 기능 저하 등이다. 장기 영향은 심혈관 부담 증가, 만성 스트레스, 우울·불안 등 정신건강 문제, 면역 기능 저하, 생식 기능 약화 등이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종의 성공은 생존과 번식에 달려 있다. 연구자들은 산업혁명 이후 두 가지 모두 부정적인 영향을 받아 왔다고 볼 수 있다고 경고한다. 산업 환경이 생물학적 피해를 주는 대표적인 사례로는 전 세계 출산율 감소와 자가면역질환과 같은 만성 염증성 질환의 증가를 꼽았다.
쇼 박사는 “산업화는 한편으로 지구상의 많은 사람에게 엄청난 부, 안락함, 그리고 의료 서비스를 제공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산업적 성과 중 일부가 우리의 면역, 인지, 신체, 그리고 생식 기능에 해로운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역설이 있다”라고 지적했다.
대표적 사례 중 하나는 1950년대 이후 전 세계적으로 나타난 정자 수와 운동성 감소다. “이는 식품에 함유된 살충제와 제초제뿐만 아니라 미세 플라스틱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라고 쇼 박사는 지적한다.
연구진은 “그렇다고 자연 속으로 돌아가 살 수는 없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2050년이면 전 세계 인구의 68%가 도시에서 생활할 것으로 예상된다. 도시화는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물결이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해결책은 도시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자연을 핵심 건강 요인으로 보고, 수렵·채집 시절의 환경과 비슷한 공간을 보호하거나 재생하는 것이다. 또 다른 접근법은 인간 생리적 특성을 고려한 더 건강하고 회복력 있는 도시 설계다.
예를 들어, △녹지·공원 등 자연 공간 확대 △소음·대기 오염 저감 정책 강화 △자연광 활용 △밤 시간 빛 공해 최소화 △보행·자전거 기반의 이동 환경 개선 △초가공식품 의존도를 낮추는 식문화 개선 같은 것이다.
연구자들은 “인류는 자연 속에서 진화했지만, 산업화의 속도는 유전적 적응 속도를 훨씬 뛰어 넘는다”며 “이제 인간의 건강을 지키는 도시를 만드는 것이 다음 과제”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지만 자연을 다시 일상으로 끌어들이고 도시 환경 스트레스를 줄이는 정책을 펴는 것이 건강 문제를 줄이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