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육아로 연구경력 뚝”…해외 영입보다 경력단절 여성인재 17만명 활용이 급선무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1월 18일 16시 39분


#1.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대기업 연구원으로 일했지만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 경력이 끊긴 여성 A 씨(48). 최근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WISET)의 경력 복귀 지원을 받아 근무가 보다 유연한 외국계 정보기술(IT) 기업으로 이직했다. 수요가 폭발한다는 인공지능(AI) 분야에 몸담고 있지만 자녀에게 컴퓨터공학 전공을 권할 마음은 없다. A 씨는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기존 지식과 기술들이 금세 ‘구식’이 되어버리는 데다, 육아 등 개인 사정으로 한번 경력이 단절되면 다시 복귀하기가 너무 힘든 것이 우리나라 현실”이라고 했다.

#2. 서울의 한 사립대 이과대학 명예교수 B 씨는 딸이 있지만 선뜻 이 길을 권하지 못한다. 이 교수는 “많은 여성 과학자들은 자신의 직업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도, 자녀에게는 추천하지 못한다”며 “전문성이 주는 보람과 가치는 크지만, 본인이 겪었던 고통과 사회 구조적 장벽이 여전히 높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라고 했다.

엔비디아로부터 그래픽처리장치(GPU) 26만 장을 확보하는 등 정부가 AI 3대 강국을 향해 드라이브를 걸고 있지만 정작 이 GPU를 활용할 인재는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정부에서 부랴부랴 인재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과학기술계에선 애써 키운 여성 STEM(과학·기술·공학·수학) 인재들이 안정적으로 연구 활동을 이어가게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입을 모은다.

● 이공계 기혼 여성 60% “딸에게 이공계 추천 안 해”

WISET에 따르면 이공계에서 육아나 결혼 등으로 직장을 그만둔 여성 인재는 2023년 기준 16만80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문애리 WISET 이사장은 “전 세계 각국이 인재를 확보하려고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차대한 시기”라며 “경력 단절 여성 인재들부터 연구 일선에 복귀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연구 커리어가 개발되는 핵심 시기가 20대 후반부터 30대인데 이때가 임신 출산 시기와 겹친다”며 “유연근무제 확대와 연구자를 위한 인건비 보조 정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18일 본보가 입수한 WISET 주관 ‘여성과학기술인 대국민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여성 인재들이 마주한 현실이 엿보였다. 이공계 전공 기혼 여성 응답자의 59.1%가 “자녀 성별이 딸이라면 이공계 진학을 추천하지 않는다”고 응답했다. 반면 미혼 여성 중에는 같은 답변을 한 비율이 46.1%에 불과했다. 이 같은 차이는 결혼 또는 출산 이후 여성의 경력 지속이 어려운 현실을 직접 체감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11일 서울시내 한 어린이집에서 어린이들이 등원하고 있다. 2025.2.11. 뉴스1
11일 서울시내 한 어린이집에서 어린이들이 등원하고 있다. 2025.2.11. 뉴스1
‘여성과학기술인 정책 우선 개선 영역’을 묻는 질문에서는 경력 단절 예방 및 복귀(일자리, 재교육, 연구과제 등)가 필요하단 응답이 15.5%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이어 △여성 연구자를 고려한 공정한 경력·성과 평가 체계(13.8%) △임금·근속기간·연구비의 성별 격차 해소(13.4%) 등이 뒤를 이었다.

AI·데이터사이언스를 연구하는 강윤철 이화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취업 기회가 생기면 연구 실적이 우수한 제자를 추천할 때가 많은데 그들이 출산·육아로 기회를 포기하는 걸 볼 때마다 안타깝다”며 “고심 끝에 출산을 포기하는 학생도 여럿 봤다”고 말했다. 과학계에서는 육아기 여성 과학자에게 가장 필요한 정책으로 긴급돌봄 사업을 꼽는다. 생물학이나 화학 등 전공에선 24시간 실험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으면 비상 상황이 생겼을 때 대처가 어렵기 때문이다.

● “여성 인력 활용으로 과학 인재 위기 극복해야”

육아 고충으로 연구를 중도 포기하지 않도록 유연근무제를 확대해야 한다는 것도 현장의 목소리다. 한국차세대과학기술한림원(Y-KAST) 간사인 권순경 경상국립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연구 현장은 일반 기업과 달라 실험, 데이터 분석, 논문 작성 등 집중 근무 형태가 필요하고 유연근무 적용이 유리한 점이 있다”며 “근무시간에 따른 평가 방식이 아니라 논문, 프로젝트 진척 등의 연구성과 기반 평가가 수반돼야 한다”고 했다.

STEM 분야의 남성 중심 연구 환경으로 인해 커리어를 포기하는 여성 인재도 여전히 적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번 조사에 따르면 진로나 경력 변경을 고려한 경험이 있느냐는 질문에 여성 과학자의 22.2%가 ‘그렇다’고 답했는데, ‘경력단절’ ‘성차별 및 조직문화’ 등을 사유로 꼽았다.

설문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남성 카르텔이 심하고 여성 과학자들은 주요 업무에서 배제된다” “유리천장이 너무 견고해 승진 기회가 없다고 느꼈다”는 의견을 냈다. 김윤영 숙명여대 기계시스템학부 석좌교수는 “STEM 분야는 남성의 학문이라는 잘못된 인식 개선도 필수적”이라며 “정부가 해외 인재를 영입해 다양성을 확보한다고 하는데, 한국에 있는 여성 인재들부터 과학계에서 잘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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