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부터 기초과학에 투자
스타트업 등 ‘양자 생태계’ 탄탄
하이브리드 양자컴 등 세계 선도
IQM은 내년 150큐비트급 출시
지난달 핀란드 헬싱키의 냉각기 제조기업 블루포스의 생산 시설에서 다양한 크기의 양자컴퓨터용 냉각기가 제작되고 있다. 사진은 1000큐비트 이상급 초전도 양자컴퓨터 냉각기인 ‘키데(KIDE)’가 만들어지는 모습.
에스포·헬싱키=전성훈 동아사이언스 PD
pabiano95@donga.com
“이게 다 주문이 들어온 거라고요?”
9월 말 핀란드 헬싱키에 있는 양자컴퓨터용 냉각기 기업 ‘블루포스(Bluefors)’의 제조 현장에 들어서자 다양한 크기의 황금빛 장치 수십 대가 동시에 제작되고 있었다. 아래쪽 지름이 좁아지는 원판 사이로 얇은 선들이 빽빽하게 연결돼 마치 샹들리에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모양새였다. 현재 가장 발전한 방식으로 평가받는 초전도체 회로 기반 양자컴퓨터의 냉각기다. 층이 내려갈수록 온도가 낮아지며, 실제로 계산을 수행하는 손톱만 한 양자 프로세서(QPU)는 샹들리에 아래쪽 끝부분 내부에 배치된다.
미래 전략기술인 양자컴퓨터는 기존 컴퓨터로는 계산이 너무 오래 걸려 사실상 해결이 불가능한 유형의 문제를 풀 수 있다. 신약·신소재 탐색, 암호 해독을 포함한 난제 해결에 유망하다. 양자컴퓨터는 어떤 물리적 상태가 하나로 정해지지 않고 동시에 존재하는 양자 중첩 등 양자 현상을 활용한 정보처리 단위 ‘큐비트(qubit)’로 계산을 수행한다. 큐비트의 형태는 구동 방식에 따라 다양하지만 보통 큐비트 수가 많고 오류가 적을수록 성능이 좋다.
현재 양자컴퓨터가 아직 기존 컴퓨터의 성능을 뛰어넘지 못하는데도 블루포스의 냉각기는 1년에 수백 대씩 생산되고 있다. 대부분 연구 개발과 교육용으로 쓰인다. 안시 살멜라 블루포스 최고제품개발책임자(CODO)는 “냉각기 크기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략 하루 1대꼴로 만들고 있다”며 “1대 제작하는 데 평균 6개월가량 소요되는데 수요가 늘면서 공장을 확장할 계획이 있다”고 밝혔다. ● 1960년대 기초과학 연구가 독보적 기업 탄생시켜
초전도 양자컴퓨터는 온도가 낮을수록 주변의 잡음이 줄어 안정적으로 작동한다. 살멜라 CODO는 “현재 기술로 구현할 수 있는 최저 온도는 7mK(밀리캘빈·절대온도의 단위)”이라고 설명했다. 섭씨로는 영하 273.143도다. 모든 입자가 완전히 운동을 멈추는 온도인 ‘절대영도’에 가까운 수준이다.
블루포스의 독보적인 기술력은 1960년대 시작된 기초과학 연구에 근간을 뒀다. 핀란드 기술연구센터(VTT)와 알토대가 함께 일군 극저온 냉각기술 연구 성과가 꾸준히 발전해 2000년대 블루포스 창업으로 이어졌다.
블루포스는 양자컴퓨터 냉각기 시장에서 거의 독점에 가까운 입지를 구축했다. 초전도 양자컴퓨터의 생산 속도가 블루포스의 냉각기 제작 속도에 달려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아직 뚜렷한 매출을 내지 못하는 양자컴퓨터 기업과 달리 실질적인 성과도 내고 있다. 전 직원이 약 700명인 블루포스의 2024년 매출은 약 2억 유로(약 3200억 원)로 수출 비중이 90% 이상이다. 블루포스 공장 내 별도 공간에서는 1000큐비트 이상급 초대형 냉각기인 ‘키데(KIDE)’가 제작 중이었다. 2023년 처음 만들어진 키데는 전 세계 첨단 양자컴퓨터 개발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미국 IBM은 2023년 세계 최초로 1000큐비트급 초전도 양자컴퓨터를 공개한 바 있다.
● 전 세계 가장 많이 깔린 핀란드산 양자컴퓨터
올해 노벨 물리학상은 원자나 전자 등 매우 작은 미시세계에서만 일어나던 양자 현상을 전자회로처럼 큰 규모에서도 구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 과학자들에게 돌아갔다. 양자역학을 실험실 밖으로 끌어내 양자 산업의 길을 연 것으로 평가된다. 초전도 양자컴퓨터의 근본 원리이기도 하다.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과학자들은 미국과 프랑스 출신이지만 현재 전 세계에 설치된 양자컴퓨터 수는 ‘메이드 인 핀란드’가 가장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 바탕에는 꾸준한 기초과학 투자뿐 아니라 기술 사업화가 활발한 양자 생태계가 있다.
핀란드 에스포에 있는 기업 IQM은 현장 설치형(온프레미스) 양자컴퓨터를 설계부터 판매까지 하는 종합 기업이다. 올해 유럽 최초로 54큐비트급 양자컴퓨터를 구현하고 현재 매년 양자컴퓨터를 약 20대씩 양산하고 있다. 내년 초 150큐비트급 양자컴퓨터 출시가 목표다.
유하 바르티아이넨 IQM 최고글로벌담당자(CGAO)가 소리굽쇠를 꺼내 초전도체 회로 방식 양자컴퓨터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에스포·헬싱키=전성훈 동아사이언스 PD
pabiano95@donga.com유하 바르티아이넨 IQM 최고글로벌담당자(CGAO)는 “IQM 양자컴퓨터는 10개 이상의 국가에서 연구자와 학생들이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 충북대에 5큐비트급 연구·교육용 모델 ‘스파크’가 설치돼 운용 중이다.
IQM을 배출한 VTT는 자체 첨단 기술 연구뿐 아니라 알토대 등과 긴밀히 협력하며 산학의 연결다리 역할을 한다. 기술 사업화를 통해 다양한 스핀오프 기업을 꾸준히 내고 있다. 덕분에 학생들도 창업에 관한 생각이 열려 있다는 평가다.
핀란드 양자 스타트업들은 알토대와 VTT를 중심으로 에스포와 헬싱키에 걸쳐 수 km 내에 기업과 기반이 모인 조밀한 물리적 생태계가 협력에 큰 도움이 된다고 입을 모은다.
핀란드는 탄탄한 양자 생태계를 바탕으로 유럽 양자 산업을 주도하고 있다. 2022년 핀란드에 설치된 유럽 최고 성능의 슈퍼컴퓨터인 루미(LUMI)는 올해부터 IQM의 50큐비트급 양자컴퓨터와 결합해 최근 각광받는 하이브리드 양자컴퓨팅 연구를 시도하고 있다.
한국과의 협력 가능성도 열려 있다. 반도체 기반의 ‘실리콘 스핀’ 큐비트를 개발하는 핀란드 스타트업 세미콘의 히마드리 마줌다르 최고경영자(CEO)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한국의 반도체 생산 능력을 고평가하며 “향후 양자컴퓨터 생산 규모가 늘어날 때 양국의 협력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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