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등장 영화만 두번째 ‘챔프’ 이환경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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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9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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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일어서는 장면? 그냥 18시간 기다렸죠”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그냥 될 때까지 기다렸지유, 뭐.”

충청도 출신인 이환경 감독(41)은 진득하면서도 집요했다. 그는 ‘챔프’(7일 개봉) 촬영 중 말이 아파서 쓰러진 뒤 다시 일어서는 장면을 찍기 위해 18시간을 기다렸다. 말은 잘 때도 서서 자기 때문에 누웠다 일어서는 장면을 포착하기가 쉽지 않다. 그의 ‘충청도스러움’이 아니었다면 이 명장면은 영화에 담지 못했을 듯하다.

영화는 한때 챔피언이었지만 시력을 잃어가는 기수 승호(차태현)와 절름발이 경주마 우박이(실버)가 만나 경마대회 우승에 도전하는 이야기를 다뤘다. ‘챔프의 진짜 주인공은 차태현이 아니라 말이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실버의 연기는 빼어났다. 교통사고로 새끼를 잃고 울부짖는 모습, 말에서 떨어진 기수 승호에게 다가가 그를 일으켜 세우는 장면은 뭉클한 감동을 준다.

“말이 이빨을 드러내며 웃게 하려면 재밌는 농담을 들려주고, 슬픈 표정을 짓게 하려면 먼저 눈물을 보여야 해요. 말(馬)과 감정이 통하면 말(言)이 없어도 대화할 수 있어요.”

개봉을 앞두고 만난 이 감독은 말 얘기가 나오자 신이 났다. 챔프는 이 감독이 말을 등장시켜 찍은 두 번째 영화다. 2006년 임수정 주연의 ‘각설탕’에서도 경마 기수와 말의 교감을 그렸다. “당시 말과 친해지려다가 낙마해 전치 12주 진단이 나왔어요. 말은 친해지기 어렵지만 감정의 벽만 깨면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죠.”

챔프의 주인공으로 차태현을 점찍은 이유는 그가 말도 잘 웃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말 타기가 쉽지 않겠다며 걱정하는 차태현에게 ‘여자인 임수정도 해냈다’는 말로 꼬드겼죠. 차태현은 나중에는 말 귀신이 씌었는지 촬영이 없는 날에도 승마를 즐겼어요.”

1년 넘게 말을 탄 차태현은 진짜 기수처럼 달리는 수준이 됐다.

“경마장 주로에서 달리는 것은 일반인은 꿈도 못 꿔요. 말이 주로에 나서면 질주 본능 때문에 흥분해서 대단히 위험합니다. 하지만 차태현은 대역 없이 해냈어요.” 경마에서 말의 최고 속도는 시속 60km 정도인데 차태현은 45∼50km의 속력을 냈다. 말 타기를 지도한 황경도 교관은 “기수를 해도 손색없는 실력”이라고 극찬했다.

동물 영화는 ‘망하기 쉽다’고 알려져 있다. 말 못하는 짐승에게서 제대로 된 연기를 뽑아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각설탕’은 130만 명, 김태희 주연의 ‘그랑프리’는 17만 명을 모으는 데 그쳤다. 그런데 연거푸 말이 나오는 영화라니.

“어릴 적부터 다람쥐 같은 동물을 좋아했어요. 말 못하는 짐승과의 교감이 얼마나 진한 감동을 주는지 느껴보지 않으면 모를 겁니다. 동물과 사람 사이에서 배운 사랑이 멜로 영화를 찍을 때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챔프는 그가 계획한 가족 영화 3부작 중 첫 번째 작품이다. “다음 영화는 지능지수가 낮은 아빠가 누명을 쓰고 사형수가 되는 이야기죠. 교도소에 수감된 아빠가 그곳에서 몰래 딸아이를 키웁니다. 내년 추석 때 또 만나요.”

‘말 배우’ 실버와 차태현이 호흡을 맞춰 색다른 감동을 주는 ‘챔프’는 추석 때 가족이 함께 보기에 좋은 영화다. 쇼박스 제공
‘말 배우’ 실버와 차태현이 호흡을 맞춰 색다른 감동을 주는 ‘챔프’는 추석 때 가족이 함께 보기에 좋은 영화다. 쇼박스 제공
■ 우박이역 경주마 ‘실버’ 연기지도 어떻게

‘챔프’는 2004년 부산경남경마공원에서 데뷔한 이후 13번이나 경주에서 우승한 절름발이 경주마 ‘루나’의 실화를 소재로 제작했다. 제작진은 루나의 감동을 재연할 ‘말 배우’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고 우박이 역의 수말 실버를 찾아냈다.

은퇴한 경주마인 실버는 사람으로 치면 중년에 해당하는 12세. 2004년까지 경주마로 뛰었는데 루나처럼 다리가 아파 경주를 그만둬야 했던 사연이 있다.

유달리 하얀 털이 빛나는 준수한 외모의 실버는 출연료로 7000만 원을 받았다. 귀하신 몸인 실버를 대신해 바다에서 수영하는 장면, 경마장에서 여러 말이 달리는 장면 등에는 대역 4마리가 동원됐다. ‘신발’도 여러 벌이었다. 해변 백사장과 경마장 주로에서는 쇠편자를 달았고, 미끄러운 초원과 딱딱한 아스팔트 위를 달릴 때는 발이 아프지 않도록 고무편자로 갈아 신겼다.

실버의 연기 지도에 이환경 감독은 당근과 채찍을 모두 동원했다. 기쁜 표정을 짓게 하기 위해 당근, 각설탕, 알팔파를 먹였다. 화가 나 앞발을 드는 연기를 할 때는 낚싯줄로 다리를 묶어 당겼다 풀었다 하며 성가시게 했다.

말은 자기 그림자에도 놀라는 예민한 동물이다. 힘든 촬영이 있는 전날 밤엔 “우박아, 내일 힘들 텐데 잘할 수 있니? 그래 할 수 있구나”라고 칭찬해 주었고, 다음 날 실버는 명연기로 칭찬에 보답했다고 이 감독은 전했다.

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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