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프랑스 만화 각색한 ‘설국열차’ 400억대작 이끄는 봉준호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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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8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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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日자본 유치해도 ‘봉준호 스타일’ 고수”

완벽주의적인 ‘편향’이 있다고 스스로를 평가한 봉준호 감독은 “다음 작품부터는 시나리오 작가의 도움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완벽주의적인 ‘편향’이 있다고 스스로를 평가한 봉준호 감독은 “다음 작품부터는 시나리오 작가의 도움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대중의 열광과 평단의 찬사, 어느 한쪽도 양보하지 않는 완벽주의자 봉준호 감독(42)에게도 단점이 있다. 관객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는 과작(寡作) 감독이라는 점이다. ‘괴물’(2006년) ‘살인의 추억’(2003년) ‘플란다스의 개’(2000년) 등 전작들을 보면 3년 주기로 영화를 내놓았다. ‘마더’(2009년 봄 개봉) 이후엔 아직 후속작이 없다.

이번에는 관객이 더 오래 애를 태워야 할 것 같다. 그는 제작비 400억 원짜리 대작 ‘설국열차’를 준비 중인데 내년 초 크랭크인해 빨라야 그해 말에나 선보일 예정이기 때문이다. ‘설국열차’는 봉 감독이 연출을, 박찬욱 감독이 제작을 맡아 일찌감치 화제가 됐다. 여기에 미국과 일본 자본이 들어오고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들이 출연하는 다국적 프로젝트다. ‘아저씨’의 제작사 오퍼스픽처스가 이 영화 제작을 위한 특수목적회사에 참여하며 미국과 일본의 투자, 배급사는 다음 달 중 최종 결정된다. 박찬욱 감독이 니콜 키드먼 주연의 ‘스토커’를, 김지운 감독이 아널드 슈워제네거 주연의 ‘라스트 스탠드’를 연출하는 등 한국 감독의 할리우드 진출 사례는 있었지만 한국이 주도하는 글로벌 영화 프로젝트는 ‘설국열차’가 사실상 처음이다.

미국 출장에서 돌아온 봉 감독을 11일 만나 ‘영화에 너무 뜸을 들인다’고 하자 “시나리오를 직접 쓰기 때문에 오래 걸린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지난달 말 시나리오 집필을 마치고 출연 배우 섭외를 위해 미국에 다녀왔으니 이제 본궤도에 올랐다는 설명이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할리우드 배우들을 만나고 왔어요(항간에는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의 출연을 거론하지만 그는 아니라고 했다). 출연진 가운데 동양인 배우는 4명뿐이고 주연은 모두 영어권 배우로 채울 생각입니다. 유일하게 출연이 확정된 송강호는 독특한 캐릭터인데 또 다른 주인공이라 할 수 있어요. ‘스타워즈’에서도 레이아 공주와 루크가 주인공이지만 해리슨 포드의 솔로 역이 더 인상적이잖아요.”

대사는 70% 이상이 영어다. 촬영도 헝가리와 체코에서 외국인 스태프와 진행한다. 미국 수출을 위해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가 배급을 맡을 예정이다. “아시아 감독이 할리우드 영화를 연출하면 대규모 스튜디오에 휘둘려 색깔을 잃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할리우드가 주도하는 영화가 아니니 제 스타일이 녹아든 작품이 될 겁니다.”

원작인 프랑스 만화 ‘설국열차’는 갑자기 빙하기가 닥쳐오면서 유일한 생존공간인 기차를 차지하기 위해 여러 인종이 벌이는 사투를 그렸다. “원작의 핵심 아이디어만 따왔을 뿐 인물과 사건은 완전히 달라요. 1년 넘게 시나리오에 매달렸어요. 늘 그렇듯이 시나리오를 탈고할 때쯤이면 ‘발정기의 암고양이처럼’ 날카로워져 아들과 아내가 슬슬 피합니다. 그래도 아내가 제일 먼저 시나리오를 평가해주는데 이번에는 점수가 좋아요. ‘플란다스의 개’ 원고를 봤을 때는 고생 좀 할 거라고 했었는데 그 말이 딱 맞더라고요.” 그의 장편 데뷔작인 ‘플란다스의 개’는 평단의 호평에도 흥행에는 재미를 못 봤다.

시나리오를 쓰는 그의 습관은 독특하다. 서울 시내 카페 4곳을 정하고 3, 4시간 간격으로 옮겨 다니며 노트북을 두드린다. “조용한 방에서는 눕고 싶은 욕구가 자꾸 생겨서요. 카페에서는 긴장감이 생겨 부지런해집니다. 등지고 앉으면 알아보는 사람도 없어요.”

영화계 데뷔 전 그에게 시나리오를 써보라고 처음 제안한 이는 박찬욱 감독이었다. “1995년 영화아카데미 졸업 무렵 박 선배가 전화해 준비 중인 영화의 시나리오를 써보지 않겠느냐고 했어요. 영화는 중간에 무산됐지만 저에게 처음 일을 준 분이었죠. 당시 제작자가 이준익 감독이었는데, 영화가 성공했다면 이준익 제작, 박찬욱 연출, 봉준호 각본의 영화가 만들어질 뻔했죠.” 이런 인연으로 박 감독은 제작사 모호필름 설립 후 2005년 봉 감독에게 ‘설국열차’를 함께하자고 제안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설국열차’를 이을 두 편의 영화 아이디어가 있다. “한편은 한 여인의 독특한 여정을 그린 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희귀한 공포영화예요. 지금 영화 준비로 무척 힘이 들지만 이 두 편을 생각하면 스스로 달콤해져요. ‘다음번에는 진짜 걸작이 나오겠구나’라는 생각 때문이죠.” 창작의 고통이 극심하다고 말했지만 그는 역설적이게도 창작의 과정에서 가장 큰 희열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한국 영화의 창의성 빈곤을 지적하면서 대기업이 관객 기호에 맞는 영화만을 제작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대기업이 영화산업을 현대화 선진화한 공로는 인정합니다. 하지만 단기 이익이 중요한 기업의 특성상 새로운 재능과 창의력에 보수적인 태도를 취할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어요. 영화는 공산품 생산과 다른, ‘미묘하고 이상한’ 산업이죠. 때로는 모험이 상업적인 성공을 가져오는데 이때의 파괴력은 어마어마합니다. 관객 취향을 계산해 만든 영화가 꼭 성공하지는 않잖아요.”
■ 원작만화 ‘설국열차’는
갑자기 닥친 빙하기… 인간들의 식량쟁탈전


장마르크 로셰트 원작의 SF만화 ‘설국열차’는 1986년 프랑스 앙굴렘 국제만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으며 주목을 끌었다. 냉전시대 갑작스럽게 빙하기가 닥치자 난방과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는 설국열차가 생존자들의 유일한 안식처가 된다.

다양한 인종과 계급이 어우러진 열차에는 술과 마약이 난무하고 사람들은 식량 확보에 목숨을 건다. 부유층은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고, 가난한 서민들은 줄어드는 물자를 차지하려고 극한의 대결을 벌인다. 이 와중에 몇몇 사람은 열차 이외의 생존 대안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만화는 프랑스 이외에는 한국에서만 번역 출간됐다. 봉준호 감독은 2005년 서울 홍익대 앞 만홧가게에서 이 작품을 발견했다. 어릴 적부터 기차에 대한 동경이 남달랐던 그는 흥미로운 스토리에 반해 3권 분량의 책을 선 채로 다 읽었다. 봉 감독의 제안으로 제작사인 모호필름이 그해 판권을 사들였지만 봉 감독이 ‘마더’를 준비 중이어서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술도 마실 줄 모르고 노는 재주도 없다는 봉 감독의 유일한 취미는 만화책과 사진집 보기. 독특하고 힘 있는 그림을 그리는 일본 작가 마쓰모토 다이요(松本大洋)의 만화를 특히 좋아한다.

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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