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집중분석]“나도 물어주세요” 여자들, 흡혈귀에 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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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19일 16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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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트와일라잇\'은 \'현대판\' 뱀파이어의 이미지를 제시했다는 평을 받는다. 남자주인공 에드워드 컬렌(가운데)과 그의 뱀파이어 가족들.
영화 \'트와일라잇\'은 \'현대판\' 뱀파이어의 이미지를 제시했다는 평을 받는다. 남자주인공 에드워드 컬렌(가운데)과 그의 뱀파이어 가족들.
'뱀파이어'라는 단어를 듣고 밤에 무덤에서 나와 살아 있는 사람의 피를 빨아 먹는다는 악귀(惡鬼)'나 매년 여름 극장가를 휩쓰는 공포영화를 떠올렸다면 구세대라는 핀잔을 듣기 딱 좋다.

흡혈귀 영화의 효시로 꼽히는 '노스페라투'에서처럼 대머리에 삐죽 솟은 귀, 퀭한 눈의 이미지로 대표되던 뱀파이어는 이제 조각 같은 외모, 사연이 숨겨져 있을 것 같은 눈 밑의 짙은 그림자, 단단한 근육질 몸매에 보통 인간은 꿈도 꾸지 못할 초능력으로 무장한 채 영화 TV 가요계 장르를 넘나들며 '뱀파이어 붐'을 일으키고 있다.

영화 '트와일라잇'을 통해 다시 태어난 뱀파이어

'뱀파이어 붐'은 지난해 개봉한 영화 '트와일라잇(Twilight)'에서 시작됐다.

'트와일라잇'의 남자주인공인 에드워드 컬렌(로버트 패틴슨)은 인간 피에 대한 욕망을 억누르고 동물의 피만 먹고 살아 인간과 공존할 수 있는 뱀파이어로 그려진다. 물론 덧니도 없고 검정 망토도 두르지 않는다. '원조' 뱀파이어와의 공통점은 영생불사의 존재로 잠도 자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햇빛을 두려워하는 것 정도다.

스케줄도 다르다. '원조' 뱀파이어들이 어두운 밤마다 인간의 피를 찾아 무작정 길을 헤맸던 반면, 트와일라잇 버전의 뱀파이어는 효율적인 사냥 스케줄 관리로 남는 시간 짬짬이 공부하고 몸을 만든다. 덕분에 컬렌은 미모에 지성까지 겸비한 뱀파이어가 된다.

햇빛을 두려워하는 이유도 다르다. '원조' 뱀파이어는 햇빛을 보면 온 몸이 불타버려 어두운 밤에만 활동했지만 트와일라잇 버전 뱀파이어는 햇빛을 받으면 온 몸이 다이아몬드처럼 빛나기 때문에 햇빛을 피한다.

컬렌에게 평범한 인간인 여자주인공 벨라(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매료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급기야 벨라는 자신도 뱀파이어가 되겠다며 남자친구 컬렌에게 자신을 물어달라고 사정하고 이를 거부하는 컬렌을 줄곧 설득한다. 인간을 파멸시켰던 뱀파이어가 인간과 공존을 넘어 선망의 대상에 이른 것.

'트와일라잇'은 '현대판 뱀파이어의 이미지를 제시했다' '뱀파이어 로맨스라는 장르를 개척했다'는 평을 받으며 전 세계에서 3억8000만 달러(약 4382억여 원)의 수익을 거뒀다. 에드워드 컬렌 역을 연기한 로버트 패틴슨이 단숨에 월드 스타로 발돋움한 것은 두말할 필요 없다. '트와일라잇'은 다음달 후속편인 '뉴 문'의 개봉을 앞두고 있으며 3편, 4편도 순차적으로 개봉한다.

영화의 원작이 된 스테파니 메이어의 동명 4부작 소설 또한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순위에 130주간 머물렀고 37개국 20여 개 언어로 번역돼 출간되며 '해리포터 시리즈를 잇는 판타지 대작'이라는 평을 받았다.

미국드라마 '트루 블러드'에서는 인간 수키 스택하우스(왼쪽)가 뱀파이어 빌 콤프턴고 사랑을 나눈다.
미국드라마 '트루 블러드'에서는 인간 수키 스택하우스(왼쪽)가 뱀파이어 빌 콤프턴고 사랑을 나눈다.

'현대판' 뱀파이어, 드라마 영화 단골 소재로

미국드라마 '트루 블러드(True Blood)'는 '트와일라잇'과 함께 뱀파이어에 새로운 이미지를 심어준 일등공신으로 꼽힌다.

지난해 7월 유료케이블채널 HBO에서 방영을 시작한 '트루 블러드'는 일본에서 인공 혈액 '트루블러드'가 발명됨에 따라 생겨난, 뱀파이어와 인간이 공존할 수 있는 가상의 도시가 배경이다.

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간 수키 스택하우스(안나 파킨)가 유독 뱀파이어 빌 콤프턴(스테판 모이어)의 마음만 읽지 못하면서 사랑에 빠진다. 드라마는 두 사람의 로맨스를 중심으로 마을에서 일어나는 의문사를 재밌게 파헤치며 회당 500만명의 시청자를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트루 블러드는 이 기세를 몰아 시즌2가 제작됐으며 시즌2에도 뜨거운 반응이 이어지자 HBO는 내년 시즌3을 선보이겠다고 발표했다.

지난 9월에는 케이블채널 CW가 두 뱀파이어 형제(이안 소머헐더, 폴 웨슬리)와 소녀(니나 도브레브)의 삼각관계를 다룬 드라마 '뱀파이어 다이어리(The Vampire Diaries)'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이 드라마는 평론가들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첫 회 시청자만 400만명에 이를 정도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 밖에도 일본에서는 피를 찾아 인간 세계로 내려온 루카(나카야마 유마)가 고등학교 교사(카토 로사)와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의 드라마 '사랑해 악마 뱀파이어 보이'가 방영됐다. 한국에서는 지난 4월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영화 '박쥐'가 가톨릭 신부 상현(송강호)이 뱀파이어가 된 후 친구의 아내 태주(김옥빈)와 위험한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으로 화제를 모았다.

그룹 '엠블랙'이 데뷔 전 '뱀파이어' 콘셉트를 내세운 티저 포스터를 공개했다.
그룹 '엠블랙'이 데뷔 전 '뱀파이어' 콘셉트를 내세운 티저 포스터를 공개했다.

드라마 영화만? 가요계에서도 뱀파이어 열풍

영화와 TV를 통해 뱀파이어가 차갑지만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존재로 그려지며 여심을 사로잡자 가요계에서도 '현대판' 뱀파이어를 활용하려는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월드스타 비가 프로듀스하며 일명 '비가 키운 그룹'으로 열려진 남성 5인조 그룹 '엠블랙(MBLAQ)'이 대표적. 지난달 데뷔한 엠블랙은 데뷔 전 '뱀파이어'를 콘셉트로 내세운 티저 포스터를 공개했다. 블랙 계통의 의상에 스모키 메이크업으로 강렬하면서도 섹시한 뱀파이어 이미지를 전달한 엠블랙은 무대 위에서도 힘 있는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주목받고 있다.

정규 1집 앨범 '하트비트'로 컴백한 그룹 2PM은 창백한 피부에 눈매를 강조한 스모키 메이크업과 흑백톤의 정장을 활용해 남성미를 극대화했다. 누리꾼들 사이에선 뱀파이어가 연상된다는 평. 2PM은 '하트비트'의 안무 중 움직임을 최소화하면서도 절도 있는 동작을 반복하는 부분을 좀비를 형상화했다며 '좀비춤'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섹시하고 강한데다 지고지순하기까지…

모두들 피해 다니던 뱀파이어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동아일보에 영화칼럼 '무비홀릭'을 연재하는 이승재 기자는 "10대들 사이에서 뱀파이어가 '지고지순한 사랑'의 대표로 소비되기 시작하면서 뱀파이어는 '흡혈귀'가 아닌 '매력적인 존재'가 되었다"고 설명했다.

액션이나 공포물의 단골 소재였던 뱀파이어가 2000년대 초반부터 '블레이드' 등 퓨전 장르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2000년대 중후반부터 '렛미인(Let Me In)' '트와일라잇' 등으로 대표되는 청춘물의 소재로 쓰이기 시작했다는 것.

영화평론가 심영섭 씨는 뱀파이어가 각광받는 가장 큰 이유로 '섹시함'을 꼽았다. 그는 "뱀파이어가 다른 괴물과 다른 점은 섹시하다는 것"이라며 특히 목덜미를 무는 그의 습관은 성적 상징성을 가진다고 해석했다. 두려움과 관능성이라는 인간의 본능을 건드린다는 것이다. 또 "뱀파이어가 '영생'한다는 것도 인간의 욕망아니냐"며 "영원히 죽지 않는 뱀파이어가 저주받은 것인지 축복받은 것인지는 고민해 볼 수 있는 문제"라고 말했다.

외국에서는 '뱀파이어 붐'을 경제위기와 연관 지어 설명하기도 한다. 미국 오로라대학교에서 '문학 영화 팝문화 속의 뱀파이어'를 강의하는 도노번 그위너 영문학과 교수는 "경제위기와 일자리 상실에 따른 두려움, 불안이 팽배한 시대에 뱀파이어의 전설은 사람들에게 큰 의미를 지닌다"며 "막강한 힘을 지닌데다 영생하며 언제나 카리스마가 넘치는 뱀파이어는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아연 기자ay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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