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스크린 속의 박지성… 배우 하지원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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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9월 12일 02시 10분



충무로를 넘어 한류개척의 선봉장이었던 70년대 초반 산(産) 여배우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다. 마지막 남은 여성 원톱 배우로 평가받은 장진영(72년생)은 최근 세상을 등졌고, 이영애(71년생)와 고현정(71년) 심은하(72년) 전도연(73년) 송윤아(73년) 등은 결혼 등의 개인적인 사정과 시대의 흐름이 겹치며 어느새 중견의 영역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그렇다면 한국을 대표하는 여배우에 가장 근접한 이는 누구일까?

다름아닌 하지원(78년생)이다.

올 여름 가장 뜨거웠던 영화 '해운대'로 1000만 흥행배우로 자리매김한 그녀는, 관객들이 지루해할 틈도 주지 않고 9월24일 우리나라 최고의 남자배우란 찬사를 받는 배우 김명민과 호흡을 맞춰 '내사랑 내곁에'로 돌아온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연말에는 올해 충무로 최대 기대작 '칠광구'가 개봉을 기다린다. 칠광구는 여주인공(하지원)이 유전인 제7광구에서 괴생명체와 맞서 싸운다는 내용의 한국형 블록버스터. 제작비 80억원 규모의 이 영화가 해운대를 뛰어넘을지 여부가 관건이다.

영화 해운대의 주인공이 '쓰나미'이고 내사랑 내곁에의 주인공이 '김명민'이라면 칠광구는 하지원을 원톱으로 내세운 최초의 영화가 된다. 데뷔 후 10년 가까이 남자배우들 곁에서 '털털하지만 건강한' 이미지를 내뿜어온 그녀가 드디어 흥행과 작품성을 모두 책임지는 주연의 자리에 올라선 셈이다. 본격적인 '하지원 시대'가 머지않았음을 입증하는 징후로 읽을 수 있다.

○ 노력파란 예쁘지 않다는 비난?

김명민과 호흡을 맞춘 영화 ‘내 사랑 내곁에’의 한장면.[화보]천의 얼굴…배우 하지원
김명민과 호흡을 맞춘 영화 ‘내 사랑 내곁에’의 한장면.
[화보]천의 얼굴…배우 하지원
장의사 역할을 실감나게 하기 위해 실제 영안실에서 시체를 닦아보기도 했어요."(하지원, '내사랑 내곁에' 기자간담회 중)

사실 이 정도의 고군분투는 '배우 하지원'을 설명할 때 미미한 사례에 불과하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이 맡은 배역에 철저하게 녹아들었다. 영화를 위해 에어로빅이나 무술 복싱을 프로에 가깝게 연마해 단 한번의 대역 없이 그대로 연기해 냈을 정도다.

관객의 평은 성공적일 때도, 실망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매 작품마다 '하지원 표' 노력은 대충이었던 적이 없었다. 색즉시공, 1번가의 기적, 해운대를 통해 하지원의 재발견에 앞장선 감독 윤제균은 그녀를 두고 "독종이자 프로페셔널한 여배우의 대표격"으로 꼽는 데 주저함이 없을 정도다.

더불어 하지원은 '여전사(戰士)' 이미지를 갖고 있는 거의 유일무이한 배우다.

MBC드라마 '다모', 이명세 감독의 '형사' 등을 통해 이미 수준급 무술 실력을 뽐낸 바 있고, 2007년작 '1번가의 기적'에서는 여자 복싱선수로 분해 조폭과 실제 펀치를 교환했을 정도다. 기존의 예쁘고 고상한 여배우가 쉽게 넘볼 수 없는 독특한 포지셔닝인 것.

이 때문인지 그에게는 '노력파' '근성' '독기' '성실' 등의 야누스적인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물론 이 자체가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다. 그럼에도 '노력파'란 표현은 받아들이는 배우의 입장에선 불쾌한 표현일 수도 있다.

뒤집어 생각하면 "예쁘고 섹시하지 않다"는 얘기이고, 한 번 더 생각하면 "자질은 부족하지만 노력으로 극복한 배우"라는 뜻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20대 여배우에게 요구하는 제 1의 가치는 '섹시'나 '관능미'에 가까웠다.

톡 건들기만 해도 터질 것 같은 매력을 발산하는 이른바 '여신(女神)'의 이미지가 당대 최고 여배우의 기본자질이자 대권(大權)의 전제조건이었기 때문. 이런 관점에서 하지원은 대중의 기대를 깨뜨리는 배우이자 여배우의 활동 영역을 대폭 넓힌 선구자적인 배우로 칭할 수 있겠다.

○ 치열했던 데뷔과정, 그리고 똑똑한 전략

영화 ‘해운대’의 한 장면. [화보]영화 ‘해운대’ 제작보고회
영화 ‘해운대’의 한 장면.
2000년 카우보이 모자를 쓴 하지원이 가수 왁스의 '오빠'를 립싱크 하며 무대에 올랐던 기억이 나요. 제가 기억하는 가장 충격적인 한국형 엔터테이너의 데뷔였으니까요. 그때 하지원의 끼와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느끼며 전율했죠."(소설가 백가흠)

예쁘지 않은 여배우의 데뷔과정은 한마디로 '피눈물의 연속'이라고 봐도 틀리지 않는다.

언제나 주연급 연기만 했을 것 같은 하지원도 무명이기에 서러운 시절이 있었다. 2000년 영화 '동감' '진실게임' '가위' 등에서 여주인공의 친구로 등장하는 수모를 감내해야 했고, 몇몇 공포영화에서는 피를 양동이로 뒤집어 써야 하는 3D역할을 도맡았다. 절대 우아하다고 표현할 수 없는 거친 데뷔였던 셈이다.

하나 더 있다. 그녀의 이름을 세상에 본격 알린 계기는 지금 관점으로도 파격적인 '얼굴 없는 가수 왁스'의 데뷔과정이었다. 당시 왁스의 '오빠'라는 노래의 무대 퍼포먼스를 하지원으로 대치시킨 것.

만약 이와 같은 모험이 10년이 지난 오늘날 반복된다면 기획사는 물론이고 가수 왁스와 배우 하지원까지도 감당할 수 없는 비난으로 인해 모멸감까지 느껴야 할지 모른다. 당시에도 논란이 없지 않았지만 배우 하지원의 폭발적 무대 매너로 그런 논란을 극복하고 모두가 윈-윈할 수 있었다. 신인이 겪어야 하는 비애를 자신의 끼와 노력으로 극복한 매우 희귀한 사례였던 것.

이후 그는 철저할 정도의 꾸준함으로 단명(短命)할 것이라는 세간의 평가를 간단히 뒤집어 버린다. 그녀의 꾸준함은 스탯(통계)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녀는 정식으로 데뷔한 2000년 이후 10년 가까이 단 한해도 쉬지 않고 작품 활동에 매진한 거의 유일한 여성 배우다. 심지어 2005년에는 4개의 영화에 등장한 적도 있다. 가장 적었던 2006년에는 KBS드라마 황진이에 온 힘을 쏟아 부을 정도였다. 보통의 스타들에게는 '휴식기'나 '잠행기간'이란 게 있지만 그녀에게 20대란 일의 연속이었던 것.

최근 '무릎팍 도사'에 출연한 그녀가 "영화와 현실이 구분이 안 간다"고 토로한 대목은 실제 그녀의 삶에 휴식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종종 "'배우'는 배우는 사람"이라고 웃으며 말한다. 실제 인터넷에 공개된 그녀의 생활신조가 "최선을 다하자! 이길 때까지 한다!"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말 그대로 그녀는 배역을 통해 성장해온 매우 특이한 케이스인 것이다.

○ 통속극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포스'

"하지원은 그녀의 이미지가 고급스럽지 않다는 것을 일찍 간파했는지 모른다. 그녀가 여배우들의 단골행차장소인 명품 런칭쇼나 심지어 럭셔리 걸의 배역으로 출연하지 않은 것도 현명한 선택이었다. 때문에 그녀의 성실한 이미지는 다름 아닌 대중과의 친밀성에서 해석할 수 있다."(문화평론가 최영일)

그녀는 대중의 열광을 불러일으키는 '워너비' 이미지도 '패셔니스타'도 아니다. 신비감이 없는 그녀의 묘한 분위기는 그녀를 종종 통속극의 주인공으로 삼는 장점으로 돌변했다.
MBC 드라마 ‘다모’의 여형사(좌)와 영화 ‘1번가의 기적’에서 가난한 복서(우)로 열연한 하지원.[화보]‘여자 복서’ 도전한 배우 하지원
MBC 드라마 ‘다모’의 여형사(좌)와 영화 ‘1번가의 기적’에서 가난한 복서(우)로 열연한 하지원.
그러나 이 같은 역할은 따지고 보면 여성들로부터는 피하고 싶은 '악녀'의 이미지를, 남성들에게는 막상 사귀면 피곤할 것 같은 '독종'의 이미지를 준 것이 사실이다. 판타지 스타가 아닌 이웃집 누나 같은 친근한 통속극의 주인공에 어울릴만한 마스크의 숙명에 가깝다.

그녀가 자신의 대표작을 통해 선보인 직업군만 살펴봐도 그녀가 갖고 있는 범상치 않은 성공 전략을 확인할 수 있다.

천민 기생 황진이, 중산층 에어로빅 선수(색즉시공), 사랑을 꿈꾸지만 이룰 수 없는 여자형사 '다모', 여행사 직원(발리에서 생긴 일), 횟집 아가씨(해운대) 등등….

그녀는 단 한 번도 결혼을 통해 인생을 역전시키는 하늘하늘 원피스를 입은 아가씨로 대중 앞에 나선 적이 없다. 오히려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도 종국엔 그 원피스에 피를 묻히는 '호러퀸'으로 내공을 닦았고, 성공한 이후에도 사랑하는 이성을 칼이나 총 심지어는 화살로 떠나보내야 하는 비극의 여주인공을 도맡아 온 것. 그녀에겐 러브스토리가 아닌 피튀기는 '비극적 이미지'가 제격인 셈이다.

한 스포츠신문 연예담당 부장은 "실제 하지원이 어설픈 여신 흉내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롱런 할 수 있었다"며 "마치 EPL에서 활약하는 박지성이 호나우두나 루니 흉내를 내지 않은 것과 흡사하다"고 정의 내린다. 스크린계의 박지성이 다름 아닌 하지원이라는 얘기다.

○ 성인물을 소화해 낸 거의 유일한 여배우

▲영화배우 하지원. 스포츠동아 자료 사진 ☞ 사진 더 보기
▲영화배우 하지원. 스포츠동아 자료 사진 ☞ 사진 더 보기
"색즉시공이야 말로 21세기판 '젊은 날의 초상'이 아닐까요. 어떤 희망도 꿈꿀 수 없는 지방대학 젊은이들이 섹스를 꿈꾸고 현실에 대한 좌절을 극복하기 위한 도구로 차력과 에어로빅에 매진한 모습이 인상적이었죠. 감독이 누구였든지 간에 하지원을 가장 먼저 떠올렸을 법 하죠."(문화평론가 조희제)

하지원을 스타로 띄운 작품은 2003년 MBC 드라마 '다모'와 2004년 영화 '색즉시공'이다.

특히 '다모'는 한국 대중문화사에 기념비적인 작품인데 다름 아닌 누리꾼들의 팬덤 현상을 확인한 첫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네티즌의 네티즌을 위한 그리고 네티즌에 의한' 드라마의 전형을 창출해 냈고 결국 다모는 한국형 드라마 제작의 원형이 됐다.

만일 '다모'에 연기파 배우 하지원이 아닌 평범한 한류스타가 등장했다면 누리꾼에 의한 재발견이 가능했을지 의문이 들 정도의 열연이었다.

다모가 하지원의 무협 이미지를 쌓았다면 2002년작 색즉시공은 그녀에게 '성인'이라는 이미지를 안긴 대표작이다. 그러나 상상이상의 노출과 음담패설의 강도로 인해 '그녀만이 가능한 도전'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류열풍 이후 우리나라 '여신' 계보를 키우는 소속사들 사이에는 노골적인 섹스신은 피한다는 게 불문율이다. 과도한 노출은 이미지 저하로 광고 수주에 큰 타격을 줄 수밖에 없다. 동년배 스타인 전지현과 김태희가 극성맞을 정도로 노출신을 기피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노출의 금기를 깬 여배우는 '전도연'이 사실상 처음이다. 이후 작품성을 앞세우는 문소리, 배두나, 강혜정 등 진짜 배우들이 종종 섹스신에 도전해 어느 정도는 정착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여배우들이 기피하는 장르는 다름 아닌 '음담패설을 앞세운 코메디류'로 지적된다.

색즉시공은 사실상 여배우에게는 재앙과도 같은 설정이다. 노출, 섹스, 혼전임신, 낙태, 음담패설 엽기 등의 소재가 2시간 내내 끊임없이 배치됐기 때문이다. 보통 여배우라면 치명적인 이미지 훼손 우려로 인해 감히 도전하기 어려운 작품이었다. 그런데 하지원은 이를 가뿐하게 소화했을 뿐만 아니라 색즉시공 자체를 600만 관객의 대박 영화로 돌변시키는 내공을 발휘했다.

○ 끊임없는 도전과 이미지 변신을 강요받는 배우

한 광고계 관계자는 "그는 절대로 예쁜 배우라고 할 수 없고, 더구나 섹시하지도 않다. 그렇다고 고고하고 도회적인 매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코메디 배우에 적합하게 유머감각을 지닌 배우도 아닌데 어디서나 빛을 발하는 것이 신기했다"고 회고하며 "결국 대중에게 현실감을 주는 마스크와 그 현실을 극복하려는 노력에서 해답을 얻었다"고 말한다.

그 덕(?)인지 그녀는 지명도나 작품 활동에 비해 절대적으로 적은 CF를 소화하는 배우로 널리 알려졌다. 이는 바로 아래 후배들인 김태희(80년생)나 전지현(81년생) 등의 필모그래피와 비교하면 간단하게 확인가능하다.

그녀에 대해 호감을 가진 사람이 적다는 사실은, 그녀만큼 다양한 작품을 성공시킨 여배우가 많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일종의 충격일 수도 있다. 대중은 끊임없이 더 젊고 아름답고 개성 있고 섹시한 여배우를 소비하고자 한다는 속성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할까.

아이러니 하게도 이제 '1000만 배우'라는 영예로운 칭호까지 얻었지만 안팎에서 끊임없이 그녀의 한계를 시험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24일 개봉하는 '내사랑 내곁에'는 30대 하지원의 연기 인생을 결정지을 터닝 포인트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라 요약 가능하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루게릭병으로 죽어가는 자신의 남자를 지켜봐야 하는 장례지도사 지수 역을 맡았다. 과거의 어느 배역보다 일상의 리얼리티와 감정의 디테일을 소화해내며 다른 차원의 연기 변신을 시도한다. 이제껏 그녀의 연기가 액션과 비극, 감동보다는 통속적 멜로에 가까웠다는 점을 고려하면 파격적인 변신이다.

물론 하지원이 지금까지처럼 성실성만을 가지고 안정을 구축해왔듯 앞으로 10년을 지낸다면 그녀는 안정적인 '국민 여배우'가 될 공산이 크다. 하지만 이런 기대는 더 큰 잠재력을 가진 하지원이라는 여배우에게는 예의가 아닐지 모른다.

'끊임없이 대중의 기대를 배반하기…' 하지원이란 배우의 숙명이 바로 여기서 시작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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