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테일, 스크린에 점묘화를 그리다

  • 입력 2009년 5월 25일 21시 04분


■‘마더’의 봉감독이 추천하는 명장면 3

'마더'(28일 개봉)를 연출한 봉준호 감독의 별명은 '봉테일'이다. '디테일(detail) 귀신'이라는 뜻. 봉 감독은 점묘화(點描畵)를 그리듯 세공해낸 한 장면 한 장면을 차곡차곡 쌓아올려 복잡하고 풍성한 맛을 가진 영화를 완성했다.

'마더' 역시 정교한 만듦새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모성과 광기의 경계를 넘나든 한 여인의 아슬아슬한 이야기가 섬세한 디테일을 통해서 생동감과 설득력을 얻었다. 봉테일이 콕 집어 골라준, 놓치지 말아야 할 세 장면을 미리 살펴본다.

① 오프닝: 춤추는 김혜자

서서히 밝아진 스크린. 텅 빈 들판 너머 멀리서 어머니(김혜자)가 비틀비틀 걸어온다.

단정한 보라색 정장에 어울리지 않게 마구 헝클어진 머리와 넋 나간 듯한 표정. 고즈넉한 바람소리에 엇박자 기타 선율이 은근하게 섞여오고, 멍하니 섰던 김 씨는 슬금슬금 춤을 추기 시작한다. 창피한 듯 눈을 가렸다 떼는 손짓 뒤로 타이틀 '마더'가 조용히 떠오른다.

도입부 댄스는 '이 여인이 곧 미칠 것'임을 암시한다. 김 씨는 "혼자서는 민망하니 촬영현장 사람들이 모두 같이 춤춰 달라"고 했다. 봉 감독은 카메라 뒤에서 실룩실룩 엉덩이를 흔들면서 "예 선생님! 지금 좋아요! 손 올리시고! 자, 뒤로 도시고! 얼굴 가리시고요!" 소리를 질렀다. 제작자와 촬영팀도 덩실덩실 춤을 췄다. 지나는 이에게는 기괴한 구경거리였을 것이다.

현장 스피커로는 '화양연화'에 삽입됐던 냇 킹 콜의 '키사스 키사스 키사스'를 틀어놓았다. '괴물'부터 함께 작업한 음악감독 이병우 씨는 현장 소리를 지워낸 영상을 보며 음악을 만들어 입혔다. 별 설명이 없었는데도 이 씨는 손으로 눈을 가리는 핵심 동작에 음악의 절정을 맞췄다. '뭔가를 숨기는 엄마의 이야기' 느낌을 위해서 봉 감독이 내심 방점을 뒀던 동작이다.

b> ② 母子의 구치소 말다툼

살인범으로 몰려 구속된 아들 도진(원빈)을 어머니는 매일 면회한다. 엄마와 아들은 두툼한 투명플라스틱 너머로 서로를 마주보며 혐의를 벗기 위해 발버둥친다. 기억을 더듬는 과정에서 뜬금없이 드러난 옛일 때문에 다툼도 벌인다.

"이제 와도 안 만나! 오지 마!" 벌떡 일어나 뒤돌아서는 도진. 봉 감독은 화면 한쪽 끝에 걸린 아들의 뒷모습을 야속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어머니를 프레임에 담았다. 그런데 최근 서울 한 극장의 시사회에 참석했던 봉 감독은 이 장면에서 화들짝 놀랐다.

"스크린 왼쪽에 간수랑 같이 문으로 나가는 아들이 보여야 하는데…. 좌우가 잘려서 아예 사라졌더라고요."

꼭 이 장면 때문이 아니더라도 '마더'는 되도록 좌우로 길쭉한 스크린에서 보는 편이 좋다. 봉 감독은 이번에 처음으로 가로 세로 2.35:1 비율의 필름을 썼다. 클로즈업 때 턱이나 이마가 자연스럽게 잘려나가 시각적 불안감과 긴장감을 높인다는 설명이다. 면회실에서처럼 시선의 수평적 흐름에 인물의 감정을 담아낸 장면도 적지 않다. 상영시설 사정으로 좌우가 많이 잘리는 극장에서는 이런 요소를 놓칠 수 있다.

b> ③ 라스트: 춤추는 그림자

'마더'는 춤으로 시작해 춤으로 끝나는 영화다. 가슴을 후벼 파는 클라이맥스가 지나간 뒤, 어머니는 정신 빠진 얼굴로 행선지 모를 단체관광 버스에 오른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뽕짝을 틀어 놓고 흥에 겨워 몸을 흔드는 여인들. 잠시 홀로 앉아 있던 김 씨도 슬며시 일어나 무리 속에 섞여든다.

이 장면은 버스와 나란히 달리는 차량에서 촬영했다. 어머니의 흔들리는 실루엣은 관객의 서글픈 감정을 고조시킨다. 봉 감독은 역광 촬영을 넉넉히 하기 위해서 저녁나절 태양이 낮은 고도로 깔려 오래 떠 있는 날짜를 계산했다. 출산예정일처럼 받아낸 'D-데이'는 1월 7일이었다.

"주변에 건물이나 산도 없어야 했죠. 그래서 찾아낸 곳이 인천공항 부근 직선도로였습니다. 남북 방향으로 곧게 달리는 버스 동쪽을 나란히 달리면서 서쪽에서 비추는 태양빛을 버스 창을 통해 그림자와 함께 담아냈죠. 영화 전체에서 가장 감정적인 장면인데, 찍는 입장에서는 과학적으로 냉정하게 접근한 셈이에요."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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