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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7월 22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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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히스 레저 신들린 연기
배트맨 압도한 조커 탄생
美 개봉 첫날 흥행 신기록
《19일 오후 10시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타모니카 3번가 크라이티리언 극장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주말 데이트족 사이에 홀로 조용히 앉아 스크린을 주시하는 관객도 적지 않았다. 전날 북미지역에서 개봉해 평일 기준 역대 최고의 첫날 수익(6640만 달러)을 낸 ‘다크 나이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묵직한 대작이었다. 국내 개봉은 8월 7일 예정. 블록버스터로는 부담스러운 상영 시간인 2시간 32분이 흐른 뒤 객석 곳곳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
이날 극장에는 19년 만에 귀환한 ‘조커(Joker)’에 열광한 관객이 많았다. 1월 사망한 히스 레저(조커 역)에 대한 헌사를 담은 엔딩 크레디트가 끝까지 올라갈 때까지 절반 이상의 관객이 자리를 지켰다.
○ 전무후무한 조커, 히스 레저
조커의 재림은 8년 만에 재개된 새 시리즈의 첫 작품 ‘배트맨 비긴즈’(2005년) 결말에서 예고됐다.
배트맨 마니아들의 관심은 1989년 팀 버턴 감독과 잭 니컬슨이 창조한 ‘아방가르드 조커’를 뛰어넘을 수 있을지에 집중됐다. 왈츠를 추듯 우아한 카리스마를 내뿜던 니컬슨의 조커는 주인공 배트맨(마이클 키튼)을 초라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19년 전 그림자에 대한 우려는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단숨에 날아갔다.
‘비긴즈’에 이어 다시 각본까지 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니컬슨 또는 원작 만화의 흔적에 얽매이지 않고 완전히 새롭게 해석한 히스 레저 판 ‘뉴웨이브 조커’를 내놓았다.
극중 광기 넘치는 신종 조커와 그의 부하들은 서로 죽고 죽이면서 데스메탈 그룹의 난장판 공연처럼 기괴한 범죄행각을 벌인다. 레저는 19년 전 조커의 품위를 지워버리고 신세기 아수라에 어울리는 광인(狂人)을 혼신의 연기로 빚어냈다.
레저의 연기는 20일자 로스앤젤레스타임스의 표현대로 ‘잊어버리고 싶어도 잊혀지지 않을 만큼 진절머리 나게 충격적’이다. 세상에 두려운 것이 없는 조커의 엽기적 언동이 불쑥 튀어나올 때마다 여성 관객들은 흠칫 놀라며 때로 새된 비명을 질렀다.
“뭐가 그리 심각해?”라고 윽박지르며 섬뜩한 블랙 유머를 연발하는 조커. ‘제리 맥과이어’(1996년)에서 톰 크루즈가 읊었던 감동의 명대사 “나는 당신이 있어야만 완전해져”의 패러디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기가 막힌다.
이 작품 촬영기간 내내 레저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고 한다. 스물여덟 팽팽하고 뜨거웠던 그의 열정이 스크린 위로 고스란히 배어난다. 조커와 배트맨 팬이라면 극장을 나서면서 레저의 조커를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에 큰 애석함을 느낄 것이다.
○ 고독한 배트맨, 파워 업
그렇다고 배트맨 역의 크리스천 베일이 조커에게 완전히 압도당한 것은 아니다.
새 배트맨 자리를 굳히며 ‘터미네이터 4’(2009년 개봉) 주연을 맡는 등 블록버스터 배우로 전성기를 맞은 베일은 개량된 배트슈트를 입고 업그레이드된 액션을 펼친다.
답답한 고무 대신 가뿐한 라텍스 갑옷을 입은 배트맨은 베일의 말처럼 처음으로 고개를 옆으로 돌릴 수 있게 됐다.
놀란 감독은 의상 디자이너 린디 헤밍이 만든 새 배트슈트에 대해 “보기에 그럴듯할 뿐 아니라 실제 전투에 유용한 첫 배트슈트”라고 말했다.
덕분에 영화 도중의 환호는 오토바이 곡예 등 화려한 액션을 펼치는 배트맨에게 돌아갔다. 개량 배트슈트의 추가 기능은 조커와의 마지막 대결에서 결정적 공헌을 한다.
빼놓을 수 없는 구경거리인 배트 카도 외양은 ‘비긴즈’와 비슷하지만 기능이 강화됐다. 영화 중반 망가지지만 ‘배트맨 포에버’(1995년)에서와 달리 맥없이 폐차되지 않고 경이로운 ‘자동 부분재활용’ 기능을 선보인다.
‘비긴즈’에서 불타버린 저택 지하 박쥐동굴은 충복 알프레도의 제안과 달리 복원되지 않았다. 대신 웨인빌딩 지하에 깔끔한 새 본부가 생겼다. 지하본부와 사무실의 미니멀리즘 디자인은 배트맨의 고독한 내면을 매력적으로 대변한다.
○ 박력 넘치는 원전 회귀
놀란 감독은 이 작품을 계기로 할리우드 데뷔작 ‘메멘토’(2000년)의 부담을 완전히 떨쳐냈다.
샘 레이미 감독이 ‘스파이더맨’을 대중의 입맛에 맞게 최적화시킨 반면 놀란은 다크 나이트를 통해 슈퍼히어로 영화에 흥미로운 대안을 제시했다.
배트맨은 선악의 경계에 선 슈퍼히어로. 원작에서는 선악을 고지식하게 구분하는 슈퍼맨과 대립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놀란 감독은 다크 나이트 마지막 장면에서 경찰이 사용했던 배트맨 호출 조명을 부숴버렸다. 경찰견에 쫓겨 홀연히 사라지는 ‘어둠의 기사’는 완벽한 원전 회귀의 모습이다.
팀 버턴이 만든 두 편의 배트맨 영화를 좋아한 관객에게는 더없이 기쁜 선물이 될 듯싶다.
하지만 극단적으로 어둡고 심각한 이 ‘하드코어 어둠의 기사’가 한국에서 흥행할지는 미지수다. ‘헬 보이’(2004년) 등 음울한 영웅들은 한국 시장에서 재미를 본 적이 없다.
흥행 여부를 떠나 다크 나이트는 슈퍼히어로 영화가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줬다. 뉴욕타임스는 이 작품을 ‘예술과 오락의 경계에서 최대한 깊고 어둡게 그려낸 배트맨 이야기’라고 평했다.
샌타모니카=손택균 기자 so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