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앞두고 군주 드라마 넘실…리더십 빈곤시대 王을 부른다

  • 입력 2007년 7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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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구나….”

“임금으로서 하고자 하는 일을 무조건 좌초시키고 보는 불순한 세력!”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듯한 이 대사는 9일 첫 방영 된 KBS2 드라마 ‘한성별곡-正’(극본 박진우·연출 곽정환) 속 내용이다. 발언의 주인공은 중신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닥친 조선의 임금 정조. 정조시대 의문의 연쇄 살인사건을 다룬 이 드라마에서 정조는 기득권 세력과 신흥 상업세력이 권력을 둘러싸고 벌이는 암투의 한가운데에서 개혁 정치를 밀어붙인다. 이 드라마 예고편이 공개된 뒤 시청자들 사이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이미지와 비슷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대선 시즌이 오면 대중은 정치인과 사극 속 주인공, 특히 만인지상(萬人之上)인 ‘왕’을 비교하곤 한다. 그래서인지 방송사들도 앞 다퉈 올 하반기 드라마로 군주 드라마를 준비 중이다.

하반기 사극의 키워드는 ‘정조 대왕’. 2, 3년 전부터 민족주의 코드로 무장한 주몽, 대조영, 연개소문 등 고구려 관련 드라마가 쏟아졌던 것과는 다른 양상이다. 앞으로 방영될 드라마들은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당시 시대상과 개혁, 군주의 리더십, 정권 교체, 왕과 신하의 갈등 등을 담고 있다.

9월 방영 예정인 MBC 드라마 ‘이산-정조대왕’은 개혁 군주 정조의 삶을 그릴 예정. ‘대장금’의 이병훈 PD가 연출을, 탤런트 이서진이 정조 역을 맡았다. 케이블방송 채널 CGV도 ‘정조의 나라’를 9월에 방영한다. 정조의 8일간 화성 원행(왕이 궁궐 밖으로 길을 떠나는 것) 일정을 배경으로 개혁파와 수구파의 대립을 묘사한 오세영의 소설 ‘원행’이 원작이다.

SBS도 8월 20일부터 조선 5대 왕 문종부터 단종, 세조, 예종, 성종, 10대 연산군까지 여섯 임금을 다룬 ‘왕과 나’(극본 유동윤·연출 김재형)를 방영한다. 당시 왕을 섬긴 내시 처선의 시각에서 권력을 사이에 둔 왕족과 세력가들의 암투를 그릴 예정이다. 문화평론가 김헌식 씨는 “조선의 재도약을 추진하는 정조의 이미지는 현 정부에서 찾기 어려운 모습”이라며 “현재 대중에게 채워지지 못한 결핍이 드라마에 반영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 드라마는 대부분 대선 경쟁이 한창일 때 방영된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왕이 주인공인 사극 방영 시점은 시기적으로 대선 등 정치적 격변기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적이 많았다.

1996∼98년 방영된 KBS1 ‘용의 눈물’은 조선 건국 초기 왕권을 잡기 위해 형제들과 치열한 암투를 벌였던 태종의 이야기를 다뤄 대권주자들의 경쟁이 치열했던 15대 대선 상황과 비교됐다. 16대 대선을 치른 2002년에는 KBS1 ‘제국의 아침’이 화제가 됐다. 고려 제4대 왕 광종을 다룬 이 드라마는 왕권을 향한 치열한 경쟁과 광종의 왕권 강화 과정을 그려 ‘국민의 정부’의 뒤를 이어 개혁 정권을 창출하는 상황과 오버랩돼 인구에 회자됐다.

정조는 비교적 순탄하게 왕위에 오르지만 왕이 된 이후 국가 개혁을 놓고 아버지(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수구파들과 일전(一戰)을 치른다. 따라서 정조의 이미지는 정권 초기부터 개혁을 주창해 왔던 여권이나 국가 선진화를 구호로 내건 야권 모두 활용 가능한 인물.

방송사 측은 우연의 일치라고 주장한다. 정운현 MBC 드라마국장은 “정치권의 반응이 워낙 민감해 오해의 소지를 없애려고 조심한다”고 말했다. ‘한성별곡-正’ 제작진도 논란이 일자 관련내용을 삭제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문화평론가들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대중에게 내재된 정치적 욕망이 작품에 반영되기 때문”이라며 “시대정신에 대한 대중의 요구 생성→대중의 기호를 읽어내는 작가, PD들이 작품에 반영→관련 드라마를 정치인이 인용해 확대 재생산되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주몽’의 최완규 작가도 “사극은 과거를 다루지만 동시대적 이슈를 내포하고 있다”고 말했다. 방송 관계자들은 대선 이후에는 세종 열풍이 불 것으로 예상했다. 내년 1월 KBS ‘대왕 세종’이 방영되기 때문이다. 세종은 역대 왕 중 가장 완벽하게 국가 경영을 선보인 롤 모델이기 때문에 새로 대권을 잡은 정치인들에게 차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김윤종 기자 zozo@donga.com

[화보]KBS ‘한성별곡-正’ 제작 발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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