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애절한 멜로+통쾌한 풍자…영화 ‘왕의 남자’ 인기 비결

  • 입력 2006년 1월 14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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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왕의 남자’는 보는 이에 따라 서로 다른 해석이 가능한 다층적인 영화다. 10, 20대는 ‘꽃미남 판타지’에, 20, 30대 여성은 ‘애절한 멜로’에, 30, 40대 남성은 ‘통쾌한 풍자’에 각각 열광했다. 장녹수(강성연)와 어울리는 연산군(정진영). 사진 제공 영화人
영화 ‘왕의 남자’는 보는 이에 따라 서로 다른 해석이 가능한 다층적인 영화다. 10, 20대는 ‘꽃미남 판타지’에, 20, 30대 여성은 ‘애절한 멜로’에, 30, 40대 남성은 ‘통쾌한 풍자’에 각각 열광했다. 장녹수(강성연)와 어울리는 연산군(정진영). 사진 제공 영화人
《“시험이 있어서 계속 못보다 오늘 엄마와 함께 영화를 봤습니다. 아… 엄마는 보면서 제 손을 지그시 잡으시더라고요.”(ID 한 여인)

“나이 마흔이 넘었는데도 영화를 본 뒤 이런 여운이 남는다는 건 마치 첫사랑을 우연히 만난 듯한 충격이라 할 만합니다.”(ID 노란성)

“광대가 절대 권력자의 비리와 만행을 서슴없이 풍자하고 조롱하는 모습에서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꼈어요.”(회사원 윤모 씨)

영화 ‘왕의 남자’ 홈페이지 자유게시판 등에 올라온 소감들이다. 요즘 술집과 식당가에서도 나이 지긋한 상사와 부하 직원들이 열을 올리며 이 영화를 소재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몇 달간 세간의 화제를 독점했던 ‘황우석 사건’의 씁쓸한 뒷맛을 씻어 내 주는 형국이다.》

관객몰이를 하는 영화들이 많은데 유독 ‘왕의 남자’가 세간의 화젯거리로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문화전문가들은 이를 ‘중층적, 입체적 코드의 힘’이라고 분석한다. 보는 이가 처한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내용의 공감이 가능한, 결이 풍성하고 중층적인 작품이라는 것이다.

▽각양각색 감동 코드=‘크로스섹슈얼’을 대표하는 이 영화의 꽃미남 이준기에게는 10대 여성 팬들인 ‘오빠부대’와 30대 여성 팬들인 ‘누나부대’가 함께 있다.

영화 개봉 후 인터넷에 개설된 이준기의 팬 카페 중에는 ‘팬픽’(팬들이 스타를 등장시켜 쓰는 소설) 카페도 4개나 있다. 10대 여학생들은 그의 예쁘장한 외모와 영화에 등장한 이미지를 동성애에 관한 팬픽으로 다루고 있다.

30대도 예외는 아니다. 회사원 홍지은(33·여) 씨는 “공길이 그림자놀이 장면에서 얼굴을 슬며시 내밀고 미소 지을 땐 ‘헉∼’ 하고 날숨이 밀려 올라왔다”고 말했다.

“영화에서도 툭하면 우는데 그때마다 안아 주고 싶을 만큼 가슴이 아파진다. 사랑을 받고 싶기보다는 해 주고 싶은 대상이다.”

여성들은 대체로 ‘멜로 영화’로 받아들이지만 30, 40대 남성들은 통쾌한 정치풍자극으로 받아들인다.

남편과 함께 영화를 본 주부 권현미(39·부산) 씨는 “내겐 애절한 멜로 영화로 다가왔는데 남편은 풍자적 사극으로 보더라”고 말했다.

영화평론가 김영진 씨는 “다층적 텍스트와 함께 정중하게 포장된 정사(正史)로서의 역사를 마구 헤집는 이 영화의 반(反)권위주의적 쾌감이 우리 시대의 풍토와 맞아떨어져 해방감과 폭발력을 가져왔다”고 분석했다.

▽등장인물에 대한 4인 4색 해석=반복해서 관람하는 관객이 유난히 많은 것도 이 영화의 특징. 홈페이지에서 한 관객은 “4번 봤는데 처음엔 공길만 보였지만 두 번째부터는 연산이 눈에 밟힌다”고 썼다. 등장인물 중 누구에게 공감하느냐에 따라 영화를 다르게 볼 수 있다는 점도 이 영화의 풍성한 결 중의 하나다.

회사원 신용훈(38) 씨는 “여자들이 좋다고 하는 공길은 징그럽게 느껴졌고 오히려 장생에게 감정이입이 돼 영화를 봤다”고 말했다.

모진 고문을 당하고도 외줄타기를 하면서 왕을 능멸하는 광대 장생이 ‘죽어도 하고 싶은 일은 하고 사는’ 자유롭고 곧은 사람으로 느껴져 대리만족을 경험했다는 것.

권력의 붕괴를 마당극 놀이로 재현하는 발상을 통해 연산의 광폭한 고뇌를 인간적으로 전달한 것도 영화의 설득력을 배가했다.

대학생 임미영(21·여·전북 전주시) 씨는 “가장 슬프고 안타깝게 느낀 사람은 ‘상처받은 왕’ 연산이었다”고 한다. “공길과 장생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마지막까지 하지만 연산은 그렇질 못해서 깊은 연민을 느꼈다”는 것.

반면 미혼인 회사원 정모(41·여) 씨는 “녹수가 자신의 품을 파고드는 연산에게 ‘미친 놈’이라고 욕을 내뱉으면서도 끌어안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면서 “뻔히 돌아올 거면서 헤매고 다니는 사내들의 헛된 꿈의 난장을 지켜보는 녹수의 시각으로 영화를 보게 됐다”고 말했다.

문화계 인사들은 ‘왕의 남자’가 다층적 결을 지닌 텍스트가 될 수 있었던 이유로 입체적 캐릭터를 꼽았다.

영화를 본 사비나미술관 이명옥 관장은 “연산을 악인이면서도 모친의 정을 그리워하는 연약함을 지닌 두 얼굴의 새로운 인물로 창조하는 등 캐릭터를 평면화하지 않고 복잡다단하게 형상화함으로써 사람과 삶을 바라보는 여유를 갖게 한 점에 감탄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 영화가 “장식적 한국미학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한국적 정체성을 통해 한국미의 정수를 보여 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지난해까지 출판계에서 활발했던 팩션(Faction·사실과 허구를 뒤섞은 장르) 붐이 ‘왕의 남자’를 통해 영화에서도 불붙기 시작했다는 시각도 있다.

한기호 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왕의 남자’는 팩션의 힘을 보여 준 작품”이라면서 “사실과 허구를 뒤섞어 현실의 중압감과 버릴 수 없는 꿈의 판타지를 호소력 있게 전달했다”고 진단했다.

김희경 기자 susanna@donga.com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원작 연극 ‘이(爾)’ 만든 김태웅 교수▼

영화 ‘왕의 남자’를 연출한 이준익 감독이 영화화 승낙을 얻기 위해 지난해 초 원작자 김태웅(41·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사진) 씨를 찾아갔을 때 김 씨는 승낙의 전제조건으로 이런 주문을 달았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난 후에 다시 오세요.”

김 씨는 ‘왕의 남자’의 원작 연극 ‘이(爾)’의 희곡을 쓰고 만든 극작가 겸 연출자다. 철학도(서울대 철학과)에서 연극인으로 변신했다.

“‘차라투스트라…’에는 ‘웃음과 춤’에 관한 부분이 나옵니다. 삶의 맨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튀어 올라오는 웃음, 이 작품을 하려면 그런 웃음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아서 그랬어요.”

영화 ‘왕의 남자’는 완성도 높은 연출도 훌륭했지만, 원작이 갖고 있는 ‘탄탄한 이야기’ 덕을 많이 본 작품이다. 2000년 초연된 ‘이’는 그해 동아연극상(작품상), 올해의 연극상(베스트5), 한국평론가협회상(희곡상) 등을 휩쓴 화제작이었다.

김 씨는 ‘연산군일기’에 나오는 한 대목에 착안해 이 작품을 썼다. “공길이 논어를 외워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으니 비록 곡식이 있은들 먹을 수 있으랴’하였다”는 대목.

그는 작품을 쓰면서 ‘연산에게 동성애 성향이 있었다’ ‘연산은 광대극을 즐겼다’는 두 가지 독특한 설정을 했다. 물론 100% 상상력의 산물이다. 이를 통해 연산-공길-장생 등 세 남자를 묶어줄 고리를 찾았다.

‘장생’은 이름만 ‘장생전’에서 빌려왔을 뿐 완전히 허구의 인물이다. 그는 장생을 통해 “‘광대정신’을 체현해 내는 인물, 세속적인 것에 대한 결핍감을 갖지 않고 중심을 갖고 사는 삶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에서는 광대들이 죽음을 상징하는 ‘관’을 깐 무대바닥에서 희극을 펼치며 위태로운 현실과 죽음을 넘어서는 웃음의 세계를 표현하는데, 영화에서는 외줄타기로 바뀌었다. 그는 “아슬아슬한 외줄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노는 광대의 모습은 연극을 가장 영화적으로 잘 바꾼 장면 같다”고 말했다.

“솔직히 영화가 이렇게 성공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는 그는 영화의 흥행 돌풍에 대해 △외국 콘텐츠보다는 ‘우리의 것’을 선호하는 추세 △영화 속 권력자와 주변 인물들의 관계가 현실 정치와 일반 조직 내 인간관계의 여러 측면을 연상케 하는 점 △세련되게 꾸미기보다는 투박할 정도로 진솔하게 밀어붙인 연출의 자연스러움 등을 성공 요인으로 꼽았다.

강수진 기자 sj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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