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4년 5월 20일 19시 44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어서 씻고 와. 밥 다 됐어.”(남편)
퇴근 후 현관문을 들어서는 아내를 위해 저녁상을 차려내는 남편. KBS2와 MBC의 주말 연속극 ‘애정의 조건’과 ‘장미의 전쟁’에서는 가정 내 남편과 아내의 역할이 바뀌어져 있다. ‘애정의 조건’에서 나만득(장용)은 사업가인 아내 이현실(윤미라)을, ‘장미의 전쟁’에서는 오일만(주현)이 병원장인 아내 허영심(윤여정)을 각각 대신해 가사(家事)를 돌본다. 일하는 아내 대신 집안 살림을 사는 ‘전업주부(專業主夫·househusband)’의 등장이다.
▽부엌으로 출근하는 남자들=‘애정의…’에서 사업 수완이 없는 나만득은 여장부인 아내가 멸치 회사 사장으로 돈을 버는 대신 자신은 집안일을 한다.
이 드라마는 남자가 가장(家長)으로 타고 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경제권을 쥔 아내는 식탁과 거실에서 늘 상석을 차지하며 남편을 구박 한다.
“당신은 집에 좀 있지 어딜 그렇게 싸돌아 다녀.” “당신이 돈 아까운 줄 모르는데, 나가서 돈 벌어봐. 안에서 내조를 잘 해야 할 거 아냐.”
이에 대해 남편은 순종적이다.
“당신 말이 우리 집 법이잖아.”
‘장미의 전쟁’에서 오미연(최진실)의 아버지 오일만은 명예퇴직 후 살림을 맡은 경우. 오일만 부부의 말다툼에서도 아내는 가부장적 태도를 보인다.
“사람이 올 때가 되면 밥을 먹도록 해놓지 않고. 그리고 누구 마음대로….”(아내)
“내 마음대루요. 내가 쓸고 닦고 한 집이니까요. 무슨 집구석이 돈만 벌어다 댄다고 꾸려지는 줄 알아요.”(남편)
![]() |
▽증가하는 전업 주부(主夫)=‘장미의 전쟁’의 이창순 PD와 ‘애정의 조건’ 김종창 PD는 “살림하는 남편의 등장이라는 새로운 사회 흐름을 반영했다”고 설명했다.
미국에서는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경제전문지 ‘포천’은 2002년 ‘가장 영향력이 큰 여성 임원 50인’ 중 남편이 전업주부인 경우가 3분의 1을 넘어섰다고 보도했다. 이들은 ‘집에 있는 아빠(stay-at-home dad)’나 ‘가정기술자(domestic engineer)’로 불린다.
한국에서도 전문직 여성이 늘어나면서 가정 내 남녀 역할의 전도(顚倒)가 나타나고,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단기 취업이 쉬운 여성이 가장 역할을 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특히 젊은 세대일수록 가정 내 남녀 역할의 전도에 대한 거부감이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결혼정보회사 ‘듀오’가 올 1월 20, 30대 미혼 남녀 48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인터넷 설문조사에서도 ‘아내가 고소득자일 경우 가사를 전담할 의향이 있는가’란 질문에 204명의 남자 응답자 중 ‘그렇다’고 답한 비율이 31.9%였다. ‘아니다’가 48.5%, ‘잘 모르겠다’가 17.6%였다.
정유성 서강대 교양학부 교수(교육학)는 “최근 학교 활동이나 성적에서 여학생들의 약진은 두드러지는 반면 남학생들은 뒤쳐져 보인다. 이런 사회적 변화를 드라마가 반영하고 있다”고 해석했다.
한국여성개발원 김영란 연구원은 “부부가 평등한 역할 분담을 하는 것이 이상적인데도 드라마에서는 남녀 역할만 바뀌었을 뿐 경제권을 쥔 여성이 남편에게 군림하는 가부장적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댓글 0